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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용마 Sep 21. 2024

행복을 말하는 사람은 행복하지 않다

행복을 말하는 사람은 행복하지 않다는 말이 있다. 내부의 결여를 인지했기 때문이다. 감정적, 정신적, 혹은 심리적 차원에서 자신이 원하는 무언가가 충족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다.


이 결여는 사랑, 안정감, 소속감, 성취감 같은 것일 수도 있고, 때로는 단순히 무언가에 몰두하는 막연한 느낌일 수도 있다. 이런 인지는 자기 성찰의 출발점이 될 수 있는데, 그 결여를 채우기 위한 변화를 모색하게 되기 때문이다.


일본 전문 인터뷰어 아가와 사와코는 "잘 말하는 사람에게는 귀를 열지만, 잘 듣는 사람에게는 마음을 연다"라고 말했다. 내가 목격한 행복한 사람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타인에게 자연스럽게 꺼낼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단순히 자신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데 그치지 않고 타인을 포함한 외부 세계에 늘 호기심이 많고 그것들에 귀를 기울이는데 익숙하다.


자기 초점적 주의(Self-focus)라는 척도가 있다. 자신이 겪은 일은 모두 자신과 관련되어 있으며 자신에게 집중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다. 자기 초점이 낮은 사람들은 힘든 상황을 겪었을 때 나 때문에 일어났거나 나에게만 일어난다는 생각을 덜한다. 반면 자기 초점이 높은 사람들은 불행과 고난이 나만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탓에 늘 외롭다.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혼자 느낌이 자주 든다면 자기 초점적 주의가 높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어떤 문제를 끙끙 앓고 있는데, 누군가도 나와 비슷하게 고통스러워한다면 내가 가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아!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라고 위안을 얻기도 하는데, 내가 가진 고통이 나만 가진 고통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종종 사람들과 대화하거나 방송을 보면 '다르다'는 동사를 '틀리다'라고 쓰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전문가들도 틀리고 자막으로 이를 ‘다르다’로 수정하는 경우도 잦았다. (아마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나도 그런 표현을 자주 쓰지 않았을까)


한국 사회는 틀림에 민감하고 다름에 둔감하다. 다름을 인정하기보다 틀림에 집중하는 경향이 강해 사람들은 틀린 부분을 찾으려 애쓰는 불행 속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다.


뭘 해야만 얻어지는 행복, 뭘 봐야만 얻어지는 행복. 어딜 가야지만 얻어지는 행복은 일시적이다. 그런데 원래 행복은 아이스크림처럼 일시적이다. 그러니 녹기 전에 누려야 한다.


다만 뭘 해야지만, 뭘 봐야지만 얻어지는 행복의 기술은 한계가 분명하다. 그것을 원할 때 언제든 할 수 있고 언제든 볼 수 있으면 행복을 아이스크림처럼 자주 꺼내먹겠지만 우리에겐 시간과 돈이 한정적이다. 애초에 그것들이 넉넉하더라도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짐으로써 얻어지는 행복은 누리면 누릴수록 역치가 올라간다.


소비의 경험은 강도를 끌어올려야만 유지된다. 하지만 일상의 소소한 경험들을 자주 누리는 빈도의 행복은 꾸준히 쌓인다.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얻어야만 채워지는 공허함 대신, 이미 주어진 것을 누리고 그것들을 다시 활용하는 경험은 쉽게 질리지 않는다. 책 <행복의 기원>에서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고 말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책 <행복의 기원>을 쓴 서은국 교수는 행복 확률을 높이려면 즐거움을 주는 다양한 '행복 압정'들을 일상에 뿌려 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본인의 행복 압정들은 친구, 평양냉면, 커피, 메시의 패스, 바흐, 좋은 책, 새로운 경험, 운전을 위한 여행이라고 소개한다.


여전히 행복과 불행. 이 두 단어 사이에 냉탕과 온탕을 오고 간다면 행복 압정과 불행 압정들을 파악해 보는 건 어떨까. 행복 압정은 주변에 많이 뿌려두고, 불행 압정은 보일 때마다 제거해 주면 되니까. 일단 눈에 보여야 시작되는 것들이 있으니 한 번 수집해 보는 것도 좋다.


여러분도 자신의 즐거운 압정들을 많이 발견하시길. 나의 즐거움에 다른 사람들이 박수를 치든 안 치든, 그리 중요하지 않다. 짧게는 일상 속에, 길게는 인생 여정에 그것을 많이 던져 놓는 것이 중요하다. 행복은 숭고한 인생 미션이 아니다. 그 압정들을 밟을 때 느끼는 여러 모양의 신체적, 정신적 즐거움의 합이다.  

책 <행복의 기원>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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