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경험주의자와 의미주의자. 이 두 종류로 나뉜다고 생각한다. 경험주의자는 순간순간의 좋은 경험을 수집하는 것을 선호하며, 폭넓은 분야를 다양하게 경험하려는 욕구가 강하다. 반면, 의미주의자는 이미 일어난 일 안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그 의미를 통해 자신을 성장시키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나 같은 경우에는 의미를 선호하는 편인데 좋아하는 것으로 가득 찬 삶보다는 불행하거나 방해되는 요소들이 내 삶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 것이 나에게는 더 나은 삶의 방식이다.
의미주의자는 이미 일어난 사건에서 의미를 잘 찾아낸다. 그들도 경험주의자처럼 '좋은 경험'을 추구하지만, 나쁜 경험 조차도 좋은 이야기가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경험의 좋고 나쁨은 그들에게 큰 의미가 없다. 오히려 좋은 경험이든 나쁜 경험이든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 좋은 이야기로 만드는지에 대한 태도에 더 관심이 많다.
경험주의자는 다양한 경험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것에 대한 관심을 '비용'으로 지불한다. 이로 인해 반복되는 일상이나 꾸준함에 대한 가치는 지속적으로 낮아진다. 그러니 꾸준함을 원하는 경험주의자는 어쩌면 그 욕구 자체가 '가질 수 없는' 형벌처럼 다가오기도 할 것이다.
경험은 즉각적인 결과를 주지만 의미는 한참 뒤에야 도착한다. 그래서 경험주의자는 대체로 성질이 급한 편이다. 이들은 경험을 수집하고 싶을 때 의미를 순간적으로 강력하게 부여하기도 한다. '매일 같은 해가 뜨지 않아', '오늘 콘서트는 오늘만 볼 수 있어' 등등. 그리고 그 의미는 경험이 수집되는 순간 다른 경험으로 바로 이동된다.
어떤 이야기는 계획 하에 꾸려지기보다 이미 경험한 것을 편집해 완성되기도 한다. 아니 대부분의 이야기는 그런 것 같다. 그래서 좋은 이야기를 갖고 싶다는 건 좋은 경험으로 가득한 삶이 아니라 내가 경험한 것 중에서 좋은 관점을 획득할 수 있는 태도에서 시작된다.
좋은 경험은 '경험의 모수'를 훨씬 많이 가진 경험주의자의 몫이지만, 좋은 이야기는 사건을 잘 엮는데 능한 의미주의자의 몫이다. 좋은 경험은 자랑거리일 수 있지만, 의미 있는 이야기가 되려면 그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하다.
사람은 보통 나이가 들면서 에너지의 각도를 좁히기 때문에 넓은 에너지를 쓰는 경험주의자에서 좁은 에너지를 쓰는 의미주의자로 변하는 경우는 많아도, 그 반대로 가는 경우는 드물다.
신형철 평론가는 책 <정확한 사랑의 실험>에서 더 이상 그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되어버렸을 때만 진정으로 성장이 가능하다고 말했는데 이는 경험주의자가 의미주의자로 변할 때, '이제는 예전처럼 좋은 경험만으로는 살 수 없겠구나'라고 깨닫는 순간의 감정과 맞닿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