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호모에코노미쿠스
수업 중 교수님이 물었다.
"혹시 놀면 불안한 사람이 있나요?"
줌으로 수업을 듣고 있어 그럴 것도 없었지만 슬금슬금 눈치를 보다가 손을 들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보내는 게 불안한 사람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열 명이 넘는 수강생 중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손을 들었다. 멋쩍은 웃음들이 오갔고 교수님은 자신도 마찬가지라고 답했다. 비생산적인 시간을 보내는 걸 불안해하는 것이 이다지도 보편적인 감정이라니, 적잖이 충격이었다.
곧 교수님이 말을 덧붙였다.
"우리 모두 자기계발하는 주체군요."
바야흐로 자기계발의 시대다. 퇴근한 직장인들은 무엇이 자신의 가치를 더 높여줄지 고민한다. 누구는 영어공부를, 누구는 자격증 공부를 시작했다는 소리가 심심찮게 들려온다. 유튜브나 블로그를 시작했다는 지인들도 여럿이다. 퇴근 후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휴식을 위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저 쉬는 것을 불안해하게 되었을까?
자기계발하는 주체
많은 이들이 느끼는 이 불안감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호모에코노미쿠스'라는 용어를 들고 와 보려고 한다. 검색창에 '호모에코노미쿠스'를 치면 확인할 수 있는 정의는 간단히 "외적 동기에 영향을 받지 않고 경제적 이득만을 위해 행동하는 사람"이다. 사실, '호모에코노미쿠스'는 꽤 고전적인 용어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전적 정의를 논하지 않더라도 경제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을 우리는 '호모에코노미쿠스'라고 부르곤 한다. 자본주의에 가장 잘 적응하는 인간을 '호모에코노미쿠스'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호모에코노미쿠스'를 자기계발하는 주체라 부르려 한다. '호모에코노미쿠스'는 자기계발하는 주체, 즉 자신의 가치를 끊임없이 높이려 하는 주체이다. 이러한 주체는 자신을 하나의 기업체로 만든다. 기업이 된 인간은 경쟁력을 계속해서 높여야 한다. 그렇지 않은 인간은 마치 경영이 악화된 기업처럼 도태된다. '호모에코노미쿠스'는 자본주의가 개인의 삶에 스며든 전형처럼 보인다. 내가 나를 하나의 기업으로 생각한다면, 나는 한 순간도 쉴 수 없다. 쉬는 만큼, 도태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호모에코노미쿠스'는 자기계발하는 주체이다. 그들에게 자기계발하지 않는 주체는 도태된 주체, 혹은 도태될 주체이다. 적어도 그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도태되거나, 그렇다고 생각하거나
결국 '호모에코노미쿠스'적인 삶의 태도를 견지할 때 모든 것은 상품이 되고 모든 것은 소외된다. 소외된 '나'는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자기계발에 몰두한다. 불안정한 현재와 또 불확실한 미래에 던져진 우리는 끝없이 불안해한다. 코로나라는 전대미문의 바이러스와 함께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로서는 자기계발이 당연한 일인 것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불안한 현재와 불확실한 미래는 우리를 조급하게 만들고 우리가 자꾸 자기계발하게 만든다. 끊임없이 자기를 계발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자기를 자본화하는 것이다. 내 스스로는 상품이 되고 나는 나를 기업화하며 브랜딩 한다. '호모에코노미쿠스'들은 도태되는 것이 두렵다.
아무 생각 없이 즐기던 취미 또한 자기계발의 대상이 되어가는 듯하다. 나 또한 취미로 하던 글쓰기로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려는 노력을 마다하지 않는다. 티비를 틀어보면 그 잘나가는 연예인들도 '부캐'를 만든다. 많은 사람들이 본업에서 벗어나 나를 위한 보험을 만들기에 혈안이다. 우리는 이러한 불안에서 파생된 노력들을 '자기계발'이라고 부르곤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정치가 개인의 삶 속으로 침투해 모두가 모두를 1인 기업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 '호모에코노미쿠스'를 만들어 냈다. 퇴근 후 쉬는 것을 두려워하며 영어 공부를, 블로그 포스팅을, 자격증 공부를 해야만 하는 '호모에코노미쿠스들.' 이것은 스스로 자본이 되기를 선택한 21세기 '호모에코노미쿠스'들의 쓸쓸한 초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