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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보로봉 Jul 08. 2016

포도즙 얼룩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여름은 조금 더 달콤해질 수 있다.

일러스트@황인정


욕조에서 책을 읽는 기술이 늘었다.

아파트로 이사 와서 가장 좋은 점은 베란다에, 그러니까 공기가 통하는 곳에 빨래를 널 수 있다는 것과, 욕조가 있다는 것이다. 이사를 마치고 꺼끌해진 손과 얼굴을 욕조의 뜨거운 물 안에 담그고 있으면 부들부들해지면서 그냥 씻는 것과는 전혀 다른 살갗이 된다. 샤워로 흐르는 물에 씻어 내는 것과 몸을 담그고 씻는 것은 확실히 다르구나, 새삼 깨닫는다. 담그고 있으면 아무래도 귀 뒤라던가, 발가락, 배꼽과의 거리가 가까워져서 차분히 그것들을 문질러 줄 수 있다. 샤워는 쉴새 없이 흐르는 물이 아까워 나도 모르게 초조해진다. 빨리 샤워를 마치고 물을 잠그고 싶지만 추운 날에는 목뒤가 차가워지는 게 싫어서 틀어놓은 채 죄책감에 빠지는, 스트레스 해소와는 좀 동떨어진 씻기가 되어 버린다.

하지만 욕조에 물을 받으면 최대한 이 물을 활용하고 싶어져서 한없이 여유로워진다. 담그고 책을 보고, 숨이 갑갑해지면 문을 열었다가 아직도 식지 않은 물에 한번 더 몸을 담근다. 머리통까지 담궈서 머리카락을 적시면 오히려 물을 아낀 것 같아 뿌듯해지기도 한다.


욕조에서 할 수 있는 일 중에 책을 읽는 것이 있다.

처음에는 책이 젖을까, 손이 아니라 팔까지 들고 보는 것이 불편했다. 다리만 들어가기도 힘들 정도로 뜨거운 물의 수증기와 열기에 숨이 가빠와서 책을 읽는 일 자체가 힘들어지기도 한다. 사실상 십분, 정도 읽으면 길게 읽은 것이다. 읽기를 즐긴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언젠가 팟캐스트(다운받아 듣는 라디오 같은 것)라는 걸 듣다 디제이가 자신은 욕조에서 책을 보며 한 시간도 넘게 있는다고 해서 그게 가능하다면 나도, 하고 시도해본 끝에 몇 가지 요령이 생겼다. 할 수 있는 거라고 누군가 정해주기라도 한 듯 말하면 금새 누구나 가능한 일이 된다.


우선 물을 너무 뜨겁게 받지 않는다. 들어가 있는 게 기분 좋을 정도로만. 사우나는 만들지 않는다.

그리고 포인트는 책이 물에 젖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것. 책을 읽는 것이 중요하다. 더러운 물도 아니니까(정말?) 좀 젖어도 마르겠지 라고 편하게 생각하고 읽다 보면 우려한 만큼 책이 젖지도 않는다. 팔에 힘을 주지 않아도, 책을 욕조에 기대도 표지에 물이 묻어나는 정도다. 책이 좀 젖어서 비틀어지면 또 어떤가. 빌려줄 때 창피한 건 물에 젖은 자국이 아니라 감성에 절어 갈겨놓은 메모들이다.


작가 하루키씨는 태풍으로 특급열차가 멈추자, 복구하는 동안 마을을 산책하고 포도 한 봉지와 필립 K 딕의 문고본을 사서 느긋하게 읽었던 추억을 에세이에서 이야기한 적이 있다.


“태풍이 지나간 뒤의 하늘은 눈부시도록 푸르고 곳곳에 흩어져 있는 물웅덩이에 흰구름의 모습이 선명하게 비쳐져 있다. 포도를 취급하고 있는 도매상 같은 상점을 지나자 싱싱하고 새콤달콤한 포도향기가 풍겨온다. 그 상점에서 나는 포도를 한 봉지 사가지고 필립 K딕의 소설을 읽으면서 그것을 한 알도 남기지 않고 먹어버렸다. 그 덕분에 내가 가지고 있는 <화성의 타임슬립>에는 온통 포도즙이 얼룩져 있다.”


아, 여름의 포도.

대부분은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해 일정이 어긋난 악몽이었을지 몰라도 읽고 있자면 물웅덩이, 새콤달콤한 포도가 떠오르는 기분 좋은 장면이다. 철로가 복구 될 때까지 마냥 기다려야 하는 상황에서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는 미안하지만, 방해 받지 않고 오랫동안 책을 읽을 수 있는 기회”로 삼는 하루키씨의 멘탈도 즐겁다. 여름의 태풍이 지나간 후의 오히려 상쾌한 시골의 마을을 산책하고 포도를 한 봉지 사서 좋아하는 소설을 읽은 것을 책에 온통 얼룩진 포도즙을 볼 때마다 기억하게 될 것이다.


일상이 여행, 이란 것은 참으로 이런 것 아니겠나, 싶다. 포도 얼룩이 책에 묻지 않도록 신경 쓴다면 한 알을 먹고 손가락을 닦아야 하고, 얼룩이 묻어버리면, 기차가 정차한 사실까지 싸잡아 짜증나는 여름으로 변하고 말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나도 즐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포도즙으로 얼룩지는 것도, 책의 끝이 물에 젖는 것도 개의치 않는다면 이제 시작하려는 우리의 여름은 조금 더 달콤해질 수 있다. 이런 이야기에는 검고 알이 굵은, 깊은 단맛이 나는 거봉 같은 국산 포도가 어울리지만, 아쉬운 대로 칠레 산 적 포도를 먹으며 이 글을 쓰고 있다. 알이 작아 몇 알씩 따서 껍질째 잘근잘근 씹어먹는다. 작은 건 작은 대로 새콤한 맛을 터트린다. 과즙이 여기저기 묻고야 마는 계절이 오고 있다. 뚜껑이 있는 플라스틱 컵에 체리를 담아 버스에서 한 알씩 물고 갔던 재작년의 여름소풍도 떠오른다. 씨를 뱉으면서 손에 묻어나던 붉은 과즙, 끈적하고 외로운 복숭아 과즙의 계절.


아이참, 큰일이다. 감성에 절어 창피한 글이 되기 전에 마지막 포도 알을 잽싸게 따먹고 일어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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