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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주류 Nov 16. 2017

회사를 만든 이유

무엇을 위해서였을까?

창업을 한 지 다음 주로 3개월이다.

매출도 슬슬 생기고, 좋은 사람들도 만나고, 잠 못자며 내 회사에 대한 고민을 하고

직장인일 때보다도 훨씬 더 빠른 속도로 한 주를 보낸다.


퇴사를 하고, 사업을 진행하면서 단 한 번도 후회를 한 적이 없지만(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것이다)

매달 숫자가 찍히던 급여 통장에 아무런 소식이 없던 첫 달엔 많이 두려웠다


'다음 달도, 내년도, 앞으로도 소식이 없으면 어떡하지?

나는 무모한 선택을 한 것일까?'


약 3년의 시간 동안 사업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 머릿속으로는 수백 번 퇴사를, 창업을 꿈꾸면서도

실행에 옮기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가족이었다.

가족이 내 발목을 붙잡았다는 것이 아니라, 가족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나의 사업 계획에 대해서 아내와 부모님, 장인어른, 장모님, 그리도 동생에게 털어놓았을 때

그 누구도 우려하지 않고 응원해 주었다.

큰 꿈을 가지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만일 누구든 나에게 돈이나 벌지 네가 무슨 사업이냐,

처자식 굶길까 봐 걱정이다라고 얘기했다면 나는 더욱 빠르게 오기와, 충동으로 사업을 결정했을 것 같다.

미친 짓이었겠지. 어쨌든


문득 나는 왜 이 사업을 시작하였는가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해보았다.

너는 왜 잘 다니던 대기업을 박차고 나와 고생을 하고 있는가?


1. 좋은 아빠, 좋은 남편

나를 쏙 빼닮은(?) 우리 아들

작년 7월에 우리 부부에게 천사가 내려왔다.

출산 전부터 열심히 동화책을 읽어주고, 이야기해줬던 태교 덕에

출산 당일에 응애응애 울던 아들은 신기하게도 내 목소리에 바로 울음을 그쳤고,

9개월부터 '아빠'라는 단어도 또박또박 불러주었다.

태어날 때부터 도 아빠를 좋아해 준 아들을 위해 나는 그 어떤 것이든 할 수 있다.


직장인이 아닌, 구멍가게 사장으로서 무엇보다 좋은 점은 시간이 자유롭다는 것이다.


아이가 아프면 함께 병원에 다녀오고,

아이가 유독 아빠에게 매달리면 놀아주고 오후에 일 하기도 하고,

아침을 점심에 먹어도 되고, 점심을 저녁에 먹어도 된다.

사무실이 답답하면 나가서 카페에 앉아 멍 때려도 되고, 몸이 안 좋으면 눈치 안 보고 집에 가서 푹 쉬면 된다.

잠을 엄청 줄이고, 일을 엄청나게 더 해도 되고

일을 적당히 줄이고, 잠을 적당히 늘려도 된다.


물론 점점 더 바빠지겠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가족에게 소홀하지 않을 것이다.

더 가정적인 아빠와, 남편이 되고 이들이 행복해하는 그 모습을 활력제로

나는 더 달리면 되는 것이니까,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을 위해 더 가정적인 남편, 아빠가 되기 위해

그래서 난, 회사를 나오고 내 회사를 만들었다.



2.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일

다양한 방송활동을 했던 나

때는 2006년 대학교 1학년 겨울, 심심풀이로 싸이월드에 올렸던 성대모사 영상이

실급검 1위를 하고, 수많은 방송 출연을 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도 속편을 만들며 크리에이터가 되었던 큰 이유는 아마 앞으로도 잊지 못할 몇 개의 방명록이었다.

컴퓨터 하드 어딘가에 찾아보면 남아있을 텐데, 기억을 되짚어 보자면 2가지 정도가 아래와 같은 내용이었다.


"요새 삶이 너무 힘들어서, 죽어버리려고 했었는데, 봉제님의 영상을 보고 얼마나 웃었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유쾌하게 살 수 있는 것이구나 하고 용기를 내어 봅니다. 저에게 용기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빠 엄마가 싸우셔서 각방을 쓰고 계셨어요. 거실에 컴퓨터가 있는데 소리 크게 틀어놓고 UCC 보다가

부모님이 나오셔서 같이 보시고는 다 같이 웃다가 부모님이 화해하셨어요. 저희 집에 평화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나가다가 싸인도 해드리고, 사진도 같이 찍어드리는 일도 많았지만 유명인이 된다는 것과 별개로

나에게 아주 의미 있던 일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바로 그 일이었다.


휴학을 하고 방송활동과 UCC 제작을 하면서, 참으로 행복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친구들이 전역을 하고 있었고, 나 역시 국방의 의무를 피할 수는 없었다.

(군생활 중에 내 방송을 봤다는 친구들이 많았다 ㅋㅋ)


군 생활하면서 선임이 되고 개인 시간이 많아지면서, 전역 후의 삶에 대해 고민했다.

전공을 살려서 개발자의 길을 걷고, S모기업에 가느냐 (대다수의 대학 친구들이 S 모, L 모, N 모 기업에 갔다)

아니면 다시 크리에이터, 방송인의 길을 걷느냐


전자는 나의 DNA에는 맞지 않는 삶이었고,

후자는 다소 위험성이 짙은 삶이었다 (당시에는)


그래서 선택한 곳이 CJ E&M이라는 미디어 기업이었다.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사람이었다면, 그게 간접적으로든 직접적으로든 가능한 회사였다.

그곳에서 나는 디지털 콘텐츠 마케팅, 제작, 기획, 운영, 크리에이터 육성 등

다양한 훈련을 할 수 있었다.


국내 최초의 MCN 사업인 DIA TV(최초 이름은 Creator Group)의 초창기 멤버로 시작했던 것도

큰 영광이자, 보람된 일이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일, 그 일을 좀 더 스케일 크게 자유롭게 해보려고 회사를 나왔다.



3. 크리에이터, 그리고 크리에이터

친정 회사 카페에서 인터뷰중... ㅋㅋㅋㅋㅋ

많은 크리에이터를 영입하고 육성하면서 좋은 첨가제가 되었던 것은, 나 역시 크리에이터였다는 점이다.


이틀, 사흘을 잠 한숨도 못 자고 편집을 해봤었고,

콘텐츠 기획을 위해 잠 못 이뤘고,

자살 충동까지 느낄만한 악플에 시달려 보기도 했고,

돈이나 명예가 아닌, 사람들에게 기쁨을 준다는 보람을 위해 달리기도 해봤었다.

진짜로 해본 사람이었기에, 해줄 수 있는 말이 많았고, 공감할 수 있는 것이 많았다.


3년 전 비드콘을 보러 미국에 갔을 때에도 놀라웠던 점은

MCN회사, 미디어 회사의 경영진 중에 '크리에이터' 출신이 많았다는 점이다.

물론 포장된 모습과 가식이 있었을지라도,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크리에이터 사이드를 정말 이해한 상태에서 사업을 영위해나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업이 확장되고 천 팀이 넘는 크리에이터 네트워크가 형성되었을 때,

어느 순간 나는 크리에이터와 함께 호흡하고, 고민하고, 기뻐하고, 슬퍼하는 담당자가 아니라

정말 비즈니스를 위한 담당자, 중간 관리자, 직장인이었다.


무엇을 시도하기 위해서는 많은 의사 결정이 필요했고

무엇을 시도하고 나서는 과정, 결과가 중요했다.


작년에 어떤 크리에이터가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감사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 분'에 나를 언급해주었다.

안 보이는 곳에서도 챙겨주고, 차별 없이 크리에이터를 가족처럼 아껴준다는 말.

적어도 나의 진심이 누군가에게는 잘 통하고 있구나 느꼈다.


크리에이터를 가족처럼 아껴준다는 것,

나는 좀 더 소수의 크리에이터에 내 정성을 쏟고, 더 강한 크리에이터가 되도록 돕기 위해

회사를 만들었다. 그래서 이유는 세 가지.


요새 만나는 사람마다 나에게 묻는다.

"요새 어때, 사업은 잘 돼?"


"잘 되지도 않고, 안 되지도 않아요."


잘 된다고 하기엔, 아직 가야 할 길이 너무 먼 먼지에 불과하고

안 된다고 하기엔, 일이 너무 잘 풀리고 있다.


난 저 위의 세 가지 이유로, 회사를 나와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나름 강력한 이유고, 저 이유를 되새기며 더욱 강력한 나를 만들어야 한다.


언젠가는 많은 분들이 내게 "요새 어때, 사업은 잘 돼?"라고 물을 때

"아주 잘 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싶다.

좀 건방져 보이려나?


이제 일 하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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