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수기 스르지산에 오르는 방법과 '승리의 십자가'가 건네는 위로
아드리아해의 진주,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에서의 한 달 살이가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붉은 지붕과 푸른 바다의 대비가 일상이 된 시간. 도시의 골목골목을 누비며 대부분의 유적을 돌아보았지만, 여전히 가슴 한구석에 숙제처럼 남겨둔 곳이 있었다. 바로 이 도시를 가장 높은 곳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스르지산(Mt. Srd)’이다.
성수기라면 고민할 이유가 없다. 구시가지 입구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단 몇 분 만에 정상에 오르면 그만이다. 하지만 비수기의 여행은 늘 예상치 못한 변수를 동반한다. 케이블카는 멈춰 서 있었고, 여행자에게는 세 가지 선택지가 주어졌다. 도보로 거친 돌산을 오르거나, 택시를 이용하거나, 혹은 띄엄띄엄 운행하는 마을버스를 타는 것.
우리는 '두브로브니크 패스'를 십분 활용하기로 했다. 택시비 편도 20~30유로(약 3~4만 원)를 아끼려는 경제적 이유도 있었지만, 현지인들의 삶이 묻어나는 버스를 타고 산을 오르는 편이 '한 달 살이'의 리듬에 더 잘 어울린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필레 게이트(Pile Gate) 앞, 섬처럼 불쑥 나온 정류장에서 17번 버스를 기다렸다. 배차 간격이 워낙 길고 토요일은 하루 1회, 일요일과 공휴일은 아예 운행하지 않는 귀한 버스다. 정류장마다 노선표가 다르니 17번이 정차하는 위치를 확인하는 것은 필수다.
약속된 11시 40분에서 5분이 지나서야 한국의 마을버스를 닮은 작은 버스가 도착했다. 버스는 올드타운의 뒤안길을 지나 굽이굽이 산길을 타기 시작했다. 한쪽은 깎아지른 절벽, 다른 한쪽은 아찔한 아드리아해를 둔 채 버스는 아슬아슬하게 고도를 높였다. 일방통행이나 다름없는 좁은 길을 통과할 때마다 오금이 저릿했지만, 창밖으로 펼쳐지는 비경에 탄성이 먼저 터져 나왔다.
약 10분의 주행 끝에 '보산카(Bosanka)' 정류장에 내렸다. 다시 내려갈 버스 시간까지는 약 한 시간.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세월의 무게를 견딘 거대한 나무들이 호위하는 숲길을 따라 걸었다. 무너져 가는 옛 건물의 잔해들이 비수기의 쓸쓸한 정취를 더했다.
숲길을 따라 돌벽 끝에서 마주한 보산카 전망대는 숨을 멎게 했다. 발아래 펼쳐진 두브로브니크 올드타운은 거대한 요새가 아니라 정교하게 만들어진 완벽한 영화 세트장 같았다. 성벽 안의 붉은 지붕들이 아드리아해의 푸른 물결과 만나는 지점, 그 비현실적인 풍경을 한눈에 담으며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다시 정상을 향해 5분 정도 더 오르니 집라인과 스카이바이크 시설이 보였다. 성수기였다면 비명과 환호성으로 가득했을 이곳은 이제 고요한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북적임이 사라진 자리를 채운 것은 오직 바람 소리와 우리 부부의 숨소리뿐이었다.
정상에 도착하자마자 시선을 압도한 것은 거대한 돌 십자가였다. 이 십자가에는 도시의 아픈 역사가 새겨져 있다. 1806년 두브로브니크를 점령했던 나폴레옹 1세가 선물한 이래 이곳의 상징이 되었으나, 1991년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당시 세르비아군의 포격으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지금 서 있는 십자가는 전쟁이 끝난 뒤 그 파편들을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모아 복원한 것이다. 시련을 딛고 다시 일어선 승리와 평화의 상징. 그 앞에서 잠시 고개를 숙여 기도를 올렸다. 무너진 돌무더기에서 다시 생명을 찾아낸 이들의 마음이 십자가에서 느껴지는 듯했다.
예상했던 대로 정상의 케이블카 스테이션은 임시 휴업 중이었다. 텅 빈 선로 위로 길게 늘어진 케이블 줄이 시야를 조금 가리긴 했지만, 그 틈 사이로 보이는 풍경은 보산카 전망대와는 또 다른 감동을 안겨 주었다. 조금 더 높은 곳에서 바라본 덕분일까. 성벽 안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주황색 지붕들은 마치 정교하게 빚어놓은 미니어처 마을 같았다. 사람들의 북적임이 거세된 그 고요한 높이에서, 나는 비로소 두브로브니크라는 거대한 유산의 전체를 가슴에 품을 수 있었다.
하행 버스 시간을 맞추기 위해 다시 정류장으로 향했다. 올라올 때의 긴장감은 사라지고, 내려가는 길은 한결 가벼웠다. 언뜻언뜻 비치는 바다와 아내의 가벼운 발걸음을 보며, 비수기 여행의 묘미는 '속도'가 아니라 '밀도'에 있음을 다시금 깨달았다.
제시간에 맞춰 도착한 17번 버스는 우리를 다시 세상으로 실어 날랐다. 흥미로운 점은 내릴 때였다. 출발지였던 필레 게이트가 아니라 부자 게이트(Buza Gate) 근처 케이블카 스테이션에서 멈춰 섰다. 만약 친절한 운전기사님이 "여기서 내려야 한다"라고 알려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엉뚱한 곳까지 실려 갔을지도 모른다. 여행자에게 건네는 현지인의 작은 친절은 늘 여행의 끝맛을 달콤하게 만든다.
두브로브니크를 여행한다면, 한 번쯤은 도시의 등 뒤로 돌아가 스르지산에 올라보길 권한다. 성벽 안에서는 절대 볼 수 없었던 도시의 '진짜 얼굴'이 그곳에 있다. 노을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이곳. 한달살이가 끝나기 전에, 우리는 저무는 해를 배웅하러 한 번 더 이곳에 오르기로 약속했다.
- 낭만봉지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