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만원으로 누린 크로아티아의 삶

영수증이 증명한 역설, 세계적 관광지보다 가혹한 우리네 장바구의 비정상

by 낭만봉지 김봉석

"거기는 물가 비싸서 숨만 쉬어도 돈 나가는 곳 아냐?"


지난해 초 유럽 여행 일정을 짜며 아내와 나눴던 대화다. 북마케도니아, 세르비아, 알바니아 같은 발칸반도의 이웃 나라들은 물가가 저렴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Dubrovnik)는 달랐다. '아드리아해의 진주'이자 드라마 <왕좌의 게임> 촬영지로 유명한 이곳은 유럽 내에서도 손꼽히는 일명 '물가 깡패'로 악명이 높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여행 경로를 포기할 수 없어 두브로브니크를 선택했고, 어느덧 이곳에서의 생활도 한 달의 막바지에 이르렀다.


'물가 깡패' 도시의 마트


IE003578935_STD.jpg (Tommy 마켓.두브로브니크의 대형 마켓 야채 코너)


두브로브니크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놀란 것은 역시 살벌한 외식 비용이었다. 올드타운 성벽 안쪽 노천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려면 5~6유로(약 1만 원)를 우습게 지불해야 했고, 전망 좋은 식당에서 파스타 한 그릇을 주문하면 금세 몇만 원이 사라졌다.


현지 생활에 적응하기 전, 가벼운 마음으로 들렀던 식당에서 나는 첫 번째 '물가 펀치'를 맞았다. 가성비 맛집으로 알려진 '오토 스트리트 푸드(Otto street food)'에서 가장 저렴한 야채 샌드위치 하나가 9유로, 우리 돈으로 약 1만 5000원이었다. 한국에서는 든든한 국밥 한 그릇을 먹고도 커피 한 잔을 곁들일 수 있는 금액이 여기선 고기 한 점 없는 빵 한 조각의 가격이었다. 바다 전망이 일품인 '빌라 칭그리아(Vila Čingrija)' 같은 레스토랑은 인당 최소 50유로(약 8만 5000원) 정도의 예산을 잡아야 했다. 아드리아해의 낭만도 배가 고프면 사치일 뿐이었다.


나 역시 처음 일주일은 지갑을 열 때마다 손이 떨렸다. 하지만 한 달이라는 시간은 여행자를 생활자로 만든다. 골목 구석구석을 누비고 현지인들의 삶 속으로 깊숙이 들어간 지 2주 차, 나는 뜻밖의 사실을 발견했다. 외식의 유혹을 뿌리치고 마트의 문을 여는 순간, 두브로브니크는 '살인적 물가'의 도시에서 '풍요로운 식탁'의 도시로 탈바꿈했다.


현지 마트의 진열대 가격표는 충격적이었다. 가장 놀라운 건 육류 가격이었다. 질 좋은 돼지고기 목살 1kg의 가격이 단돈 4유로(약 6800원) 내외였다. 방금 전 노천 카페에서 마셨던 커피 한 잔이 6유로였는데, 성인 네 명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고기 1kg이 그보다 저렴했다. 야채와 과일 역시 한국의 절반 수준이었다.


사실 이 충격은 한국의 '비정상적인 물가'에 대한 역설적인 방증이기도 하다. 사과 하나에 1만 원을 호가하는 '금사과' 사태를 보며 국민들은 한숨을 내쉰다. 유통 단계의 거품과 인건비 상승이 맞물리며 한국의 신선 식품 물가는 세계 최고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OECD 국가 중에서도 먹거리 물가 상승률이 최상위권을 달리는 한국의 현실을 생각하니, 아드리아해 너머의 이 저렴한 고기 가격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은 씁쓸한 현실로 다가왔다.


한국 대형마트에서 삼겹살 1kg을 사려면 3만 원 가까운 돈을 내야 하고, 야채와 과일 몇 개만 집어도 카드 값은 순식간에 올라간다. 하지만 유통 단계가 단순하고 농축산업이 활발한 이곳에선 필수 식재료가 공산품인 커피보다 저렴했다. '기후 위기'와 '유통 구조'라는 변명 아래 치솟기만 하는 한국 물가를 피해,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유럽의 '물가 깡패' 도시에서 식비의 해방을 맛보고 있었다.


"거기 물가 비싸서 어떡하냐"는 말에 반문하고픈 것


IE003578937_STD.jpg (두브로브니크 패스권. 종이 패스권에 있는 바코드로 태그)


물론 이곳의 모든 것이 저렴하진 않았다. 시내버스는 한 번 타는 데 1.73유로(약 3000원), 기사에게 직접 결제하면 2.50유로(약 4300원)까지 치솟았다. 한국에서 회사 셔틀버스를 타거나 지하철과 버스를 오가는 '무료 환승'의 축복을 누리던 나로서는 버스 한 번 탈 때마다 묘한 상실감이 순간 들었다.


택시비는 더 가혹했다. 숙소에서 올드타운까지 불과 2.5km 내외의 거리임에도 시간대에 따라 10유로(약 1만 7000원)를 훌쩍 넘겼다. 한국의 택시가 얼마나 저렴하고 편리한지 뼈저리게 실감했다. 하지만 우리는 7일권 '두브로브니크 패스'를 30유로(약 5만 1300원)에 구입해 돌파구를 찾았다. 시스템을 이해하고 활용하니 비싼 교통비 속에서도 경제성을 잡을 수 있었다.


한 달이 지나고 마지막 영수증을 정리하며 나는 놀라운 숫자를 마주했다. 한국에서 외식, 쇼핑, 주유 등으로 쓰는 한 달 평균 고정 비용은 약 400만 원 선. 하지만 비수기 두브로브니크에서 사용한 총비용은 186만 6554원이었다. 실제 생활비만 따지면 약 80만 원 남짓이며, 기타 경비를 넉넉히 합쳐도 약 200만 원이 채 되지 않았다. 상세 내역을 뜯어보니 숙박비에 약 109만 원, 한 달 장보기 비용에 약 59만 원이 지출되었다.

IE003578940_STD.jpg (두브로브니크 한달살이 총비용. 한달동안의 숙박 비용을 포함한 생활비)


우리는 흔히 유럽의 물가를 걱정하며 여행 가방을 싸지만, 정작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동네 마트의 가격표가 세계에서 가장 가혹하다는 사실은 애써 외면해왔는지 모른다. 복잡한 유통 단계에서 발생하는 과도한 마진, 기득권을 가진 자들의 담합 그리고 수급 불안정은 언제나 소비자의 몫으로만 돌아온다. '살인적 물가'라는 오명은 이제 두브로브니크가 아니라, 매일 아침 사과 한 알을 집어 들기조차 두렵게 만드는 우리 사회의 비정상적인 물가 구조에 붙여져야 마땅하다.


결국 두브로브니크 한달살이의 영수증이 증명한 것은 여행의 낭만이 아니라 한국 고물가 사회의 민낯이었다. "거기는 물가 비싸서 어찌 사느냐"는 걱정 섞인 질문에 이제는 반문하고 싶다. "이토록 비싼 장바구니 물가를 견디며 사는 우리네 삶은 안녕한가"라고 말이다.


조기 은퇴 후 세계를 유람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기본적으로 축적되어 있어야 한다고만 믿었다. 하지만 두브로브니크에서 한 달을 살아보며 마주한 진실은 달랐다. 낯선 유럽 땅에서의 생활비가 오히려 한국에서의 장바구니 물가보다 저렴하다는 사실은, 자금난을 걱정하던 나에게 역설적인 안도감을 주었다.


코스피 5000 시대를 열고 AI 강대국으로 도약하는 화려한 국력 이면에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식탁 물가가 도사리고 있다. 이제는 개인에게만 근검절약을 미덕으로 강요할 것이 아니라, 뒤틀린 유통 구조와 물가 정책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화려한 수치보다 중요한 것은, 평범한 은퇴자의 식탁 위에서도 느껴질 수 있는 실질적인 풍요가 아닐까.


- 낭만봉지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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