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아티아의 기묘한 풍경, 파그(Pag)

거친 바람과 돌담이 만든 ‘달의 섬’ 파그

by 낭만봉지 김봉석

"여보, 렌트해서 플리트비체 가자!"


아내가 갑자기 방긋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폭탄선언(?)을 했다. 크로아티아 여행의 꽃이라 불리는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에 가자는 제안이었다. 아내가 흥분해서 말할 정도라면 분명 놓쳐서는 안 될 장소임이 분명했기에, 나는 깊은 고민 없이 허락의 사인을 보냈다.


하지만 준비 과정을 들어보니 만만한 거리가 아니었다. 자다르 숙소에서 약 1시간 40분을 달려야 하는 곳. 아내는 이미 모든 교통편을 섭렵한 듯, 나에게 ‘렌터카’라는 카드를 내밀었다. 낯선 이국땅에서의 운전이라니. 은퇴 후 느긋하게 걷는 여행에 익숙해진 나에게 그것은 일종의 도전이자 모험이었다.


우리는 글로벌 렌터카 업체인 ‘Sixt’를 통해 오펠 코르사(Corsa)를 예약했다. 보험은 휠과 유리창을 제외한 풀커버로 3일에 189유로. 가성비 있는 선택이라 자부하며 날씨 앱 3개를 교차 확인한 후 가장 맑은 날로 대망의 렌트일을 정했다.


속사포 영어와 ‘무료 업그레이드’의 함정

렌트 당일, 터미널 근처 샵까지 걷는 길은 평소 우리 부부의 산책 코스처럼 가벼웠다. 하지만 샵에 도착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여직원의 영어는 마치 원어민 수준의 속사포 랩 같았다. "무료 업그레이드!"라는 반가운 단어가 들리는가 싶더니, 내민 청구서에는 예약가보다 훨씬 높은 320유로가 찍혀 있었다.


청구서를 유심히 뜯어보니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휠·유리창 보험과 '선지불 유류비' 항목이 슬쩍 포함되어 있었다. 샵에서는 "주변 주유소가 비싸다"며 유혹했지만, 은퇴자의 경제 감각을 우습게 봐선 안 될 일. 우리는 과감히 불필요한 항목을 걷어내고 처음 예약했던 189유로를 사수했다.


업그레이드된 차량은 시트로엥 DS4. 최첨단 사양에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디젤 특유의 묵직한 가속감에 적응했다. 자다르의 도심을 벗어나 아드리아해를 옆에 끼고 달리는 기분은, 직장 생활 내내 정해진 노선만 달리던 셔틀버스에서의 해방감과는 차원이 달랐다.

(자다르에서 렌트한 시트로엥 DS4)


파그 다리, 다른 행성으로 넘어가는 차원의 통로

첫날의 목적지는 차에 적응할 겸 선택한 자다르 근교의 파그(PAG) 섬이었다. 섬에 들어서자마자 우리는 탄성을 내뱉었다. 그곳은 지구가 아니라 마치 화성에 온 듯한 돌의 나라였다.

(지구와 화성을 잇는 차원의 통로, 파그 다리)


섬과 본토를 잇는 파그 다리(Paški most)는 이 다른 세계로 진입하는 성문 같았다. 1968년 개통된 300m 길이의 이 아치형 콘크리트 다리는 삭막한 바위 절벽과 푸른 바다를 가로지르며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한다. 다리를 건너는 순간,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은 수천 년 동안 '보라(Bora)'라고 불리는 강력한 북풍과 염분 섞인 공기가 빚어낸 거친 예술작품이었다. 나무 한 그루 없이 속살을 드러낸 회색 바위들은 이곳이 생존이 쉽지 않은 땅임을 웅변하고 있었다.


15세기의 보루 포르티차 요새, 그리고 양떼와의 조우

섬의 깊숙한 곳으로 향하다 마주한 포르티차(Fortica) 요새. 15세기 오스만 제국의 위협으로부터 자다르와 파그 섬 사이의 해상 통로를 지키기 위해 세워진 방어 거점이다. 지금은 세월의 풍파 속에 작은 잔해만이 남았지만, 그 척박한 돌무더기 위에서 바다를 감시했을 옛 병사들의 고단함이 느껴졌다.

(세월의 풍파를 견딘 15세기의 파수꾼. 포르티차 요새)


요새를 지나 다음 장소로 이동하던 중, 우리는 예기치 못한 ‘원주민’들을 만났다. 바로 파그 섬의 양떼들이었다. 척박한 바위틈에서 자라는 향긋한 야생 허브와 짠 기운 머금은 풀을 먹고 자라는 이 양들은, 우리가 지나가자 일제히 고개를 들어 우리를 쳐다보았다. 마치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처럼, 똑같은 표정으로 이방인을 응시하는 녀석들의 모습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파그섬의 터줏대감. 세계 최고의 치즈를 선물하는 양떼들)


파그 섬의 양유 치즈인 ‘파시키 시르(Paški sir)’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유는 바로 이 거친 카르스트 지형에서 살아남은 양들의 강인한 생명력 덕분일 것이다. 농사는 지을 수 없지만, 넓게 펼쳐진 바위 지형이 자연스럽게 천연 방목장이 되어준 셈이다.


제주도 돌담이 왜 여기에? ‘수지드(Suhozid)’의 비밀

섬을 가로지르다 보니 낯익은 풍경이 보였다. 제주도의 돌담과 너무나 닮은 낮은 담들이 섬 전체를 그물망처럼 덮고 있었다. 이는 크로아티아의 전통 건식 돌담인 ‘수지드(Suhozid)’다.

(바람과 돌이 쌓아 올린 인류의 유산, 수지드'Suhozid')


이 돌담은 단순히 영역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다. 파그 섬의 혹독한 바람인 ‘보라’로부터 양들을 보호하고, 거친 바위 지형에서 그나마 귀한 흙이 바람에 날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조상들이 수백 년간 하나하나 쌓아 올린 눈물겨운 생존의 기록이다. 접착제 하나 없이 오직 돌의 모양과 무게만으로 쌓아 올린 이 담장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되어 있다. 제주도의 돌담이 바람을 이겨내기 위한 지혜였듯, 파그 섬의 돌담 역시 척박한 자연에 순응하며 길을 찾아낸 인간의 의지였다.


루치차 해변, 화성에 물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

마지막 종착지는 루치차(Ručica) 해변이었다. 해변이라기보다는 거대한 돌 사막 같았고, 만약 화성에 물이 존재한다면 딱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비현실적이었다.

(미지의 행성을 걷는 아내의 발걸음. 루치차 해변)


우리는 임시 휴업 중인 비치바의 낡은 의자에 앉아 싸온 샌드위치를 꺼냈다. 주변에는 우리 부부와 바위, 그리고 멀리 보이는 푸른 바다뿐이었다. 고요하다 못해 적막한 이 풍경 속에서 샌드위치를 씹으며 우리는 잠시 외계인이 된 듯한 착각에 빠졌다.

(외계인이 된 기분으로 즐기는 특별한 오찬)


은퇴 후 우리가 찾아 헤맨 것은 어쩌면 이런 '낯섦'이었을지도 모른다. 익숙한 아파트 숲과 직장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화성 같은 돌섬의 해변에서 아내와 마주 앉아 먹는 식사. 0.90유로의 재활용 바우처가 주는 행복과는 또 다른, 대자연의 거칠고도 순수한 위로가 그곳에 있었다.


렌터카 핸들을 잡으며 느낀 것


자다르로 돌아오는 길, 시트로엥 DS4의 핸들을 꽉 쥐어본다. 처음엔 낯선 길과 속사포 영어에 당황하기도 했지만, 내가 원하는 곳으로 핸들을 꺾고 엑셀을 밟는 그 단순한 행위가 은퇴 후의 삶과 참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정해준 궤도가 아닌, 우리가 직접 짠 코스를 따라 달리는 여행. 비록 길을 잘못 들어 헤매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비용에 실랑이를 벌이기도 하지만, 그 과정에서 마주하는 양떼의 시선과 신비로운 돌담은 오직 직접 운전대를 잡은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파그 섬의 거친 바람을 견디며 쌓아 올린 돌담처럼, 우리 부부의 다음 챕터도 그렇게 단단하고 아름답게 쌓여가길 바라본다.


- 낭만봉지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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