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정이 사는 크로아티아 '플리트비체'

[크로아티아 렌터카 여행] 플리트비체 국립공원 B코스 완주기

by 낭만봉지 김봉석

햇살이 허락한 ‘요정의 숲’으로의 초대


렌트 둘째 날, 드디어 아내가 그토록 고대하던 플리트비체 국립공원(Plitvice Lakes National Park)으로 향하는 날이다. 1979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이곳은 16개의 상호 연결된 호수와 90여 개의 폭포가 어우러진 크로아티아의 보석이다.


날씨 앱 세 개를 번갈아 확인하며 고심 끝에 잡은 날답게, 아침부터 기분 좋은 햇살이 창가를 두드린다. 숙소에서 편도 1시간 40분 거리. 우리는 서둘렀다. 부엌에서는 아침 식사와 산행 중 먹을 샌드위치를 준비하는 아내의 분주한 손길이 느껴지고, 나는 그 정성에 화답하듯 고프로 카메라와 여분의 배터리 그리고 필요한 물품들을 챙기며 짐을 꾸렸다. 은퇴 후 이토록 설레는 ‘출근 준비’가 또 있었을까.


웨이즈(Waze)가 안내하는 낯선 길, 정해진 속도의 미학

첫날 파그섬의 운전 경험으로 차와 도로에 익숙해진 덕분인지 자연스럽게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크로아티아 여행자들이 즐겨 쓴다는 내비게이션 앱 '웨이즈(Waze)'를 켜고 목적지를 입력했다.


크로아티아의 도로는 한국과 닮은 듯 다르다. 우측 표시등이 따로 있는 신호 체계나 낯선 교통표지판은 늘 긴장을 늦출 수 없게 만든다. 특히 한국처럼 친절하게 알려주지 않는 과속 단속 시스템은 무척 위협적이다. 알아볼 수 없는 문구의 카메라 표지판과 전봇대 위쪽에 교묘하게 숨겨진 작은 카메라를 앱이 뒤늦게 알려주기도 하지만, 자칫 방심하면 은퇴 자금이 과태료로 날아갈 판이다. 나는 규정 속도에 눈을 고정하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도로 위를 달렸다. 서두를 것 없는 은퇴자의 삶이 도로 위에서도 그대로 투영되었다.

(전봇대 위에 숨은 과속카메라)


비수기의 선물, B코스에서 만난 ‘벨리키 슬랩’의 위용

플리트비체 주차장에 도착하니 예상 밖의 행운이 기다리고 있었다. 겨울 비수기라 주차 비용이 무료였던 것. 우리가 선택한 B코스는 플리트비체의 정수로 불리는 하부 호수(Lower Lakes)를 집약적으로 둘러보는 코스다. 겨울철에는 안전상의 이유로 상부 호수를 포함한 H코스 등이 폐쇄되기에, B코스는 여행자들에게 허락된 최선의 선택지였다.


입구를 통과하자마자 귓가를 때리는 웅장한 물줄기 소리가 우리를 압도했다. 소리를 따라 시선을 돌리자마자 마주한 것은 ‘벨리키 슬랩(Veliki Slap)’. 높이 87m에 달하는 크로아티아 최대 규모의 폭포다. 수직으로 쏟아지는 거대한 백색 물줄기는 겨울잠에서 깨어난 대지의 포효처럼 들렸다.


영롱한 에메랄드, 요정들이 부리는 ‘물의 마법’

폭포를 더 가까이 보기 위해 나무 데크(Plank walk) 길로 발을 내디뎠다. 코스가 워낙 다양해 길을 잃을까 걱정했지만, 곳곳에 세워진 이정표가 친절한 길잡이가 되어주었다. 계곡 아래로 내려가자 비현실적인 광경이 펼쳐졌다.


호수의 물빛은 뭐라 형언하기 힘든 영롱한 에메랄드빛을 띠고 있었다. 석회질 성분이 침전되며 만들어진 이 투명한 물은 바닥의 나뭇가지 하나까지 생생하게 보여줄 정도로 맑았다. 잔잔하게 흐르던 물이 갑자기 벼랑 끝에서 쏟아지며 내는 강렬한 굉음은 기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영화 <아바타>의 배경이 된 판도라 행성이 이곳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말이 단숨에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폭포 아래를 지나는 나무다리 위에 서자 오금이 살짝 저려왔다. 발바닥 아래로 수만 톤의 물이 요동치며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보라가 일으킨 무지개와 크고 작은 폭포들이 만드는 천연의 하모니는 이내 공포심을 경외감으로 바꿔놓았다.

(공포를 위로로 바꾼 요정의 선물, 폭포 위 무지개)


벨리키 슬랩이 뿜어내는 차가운 물보라가 뺨에 닿을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요정의 숲’ 한복판에 있음을 실감했다.

(87m의 포효, 플리트비체의 심장이 뛰는 소리)


선착장 P3에서 맛본, 세상에서 가장 값진 오찬

에메랄드빛 호수를 거슬러 올라가는 길은 전혀 힘들지 않았다. 투명한 물속을 구경하고, 때로는 데크 위로 솟구쳐 오르는 강렬한 물줄기를 피해 아내와 장난치듯 걸었다. 그렇게 판타지 소설의 한 페이지 같은 길을 걷다 보니 어느덧 P3 선착장에 도착했다.

(에메랄드빛 유혹, 물 위를 걷는 마법의 길)


선착장 앞 넓은 잔디밭에는 여행자들을 위한 휴게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우리는 적당한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아침에 정성껏 싼 샌드위치를 꺼냈다. 파그(Pag) 섬의 거친 바위 언덕에서 먹었던 것과 같은 메뉴였지만, 맛은 전혀 달랐다. 따스한 햇살이 무릎을 적시고 눈앞에는 보석 같은 호수가 찰랑이는 이곳은 그 어떤 미슐랭 레스토랑보다 값진 식탁이었다. 자연이 차려준 성찬 앞에서 우리는 말없이 샌드위치를 씹으며 이 호사스러운 정적을 만끽했다.

(미슐랭 레스토랑이 부럽지 않은 '호수 뷰' 샌드위치)


보트 위의 재회, 연애 시절의 떨림을 되찾다


식사 후 30분 간격으로 운행하는 전기 보트에 몸을 실었다. 환경 보호를 위해 소음과 매연이 없는 전기 모터로 움직이는 보트는 호수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아내와 나는 약속이라도 한 듯 보트 맨 앞자리에 앉았다.

(호수의 정적을 깨지 않는 '녹색 이동수단' 전기 보트)


호수 위로 불어오는 바람은 제법 쌀쌀했다. 그때였다. 아내가 자연스럽게 내 쪽으로 몸을 기대며 내 팔에 팔짱을 끼어왔다. 두꺼운 외투 너머로 전해지는 아내의 온기. 주변의 신비로운 풍경 덕분이었을까, 아니면 낯선 곳에서 서로만을 의지하며 여행하는 동질감 덕분이었을까. 순간 나는 20여 년 전 연애 시절의 설레는 청년으로 돌아간 듯한 착각에 빠졌다. 거울 속의 나는 늙었을지언정, 아내를 향한 마음만큼은 플리트비체의 물빛처럼 여전히 투명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셔틀버스와 고지대 산책로, 하늘에서 내려다본 요정의 집


P1 선착장에 도착해 다시 셔틀버스(Panoramic Train)를 타기 위해 ST2 정류장으로 향했다. 버스는 숲길을 따라 ST1 정류장에 우리를 내려주었다. 이제부터는 다시 1번 입구까지 돌아가는 고지대 산책로 코스다.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던 풍경과는 또 다른 장관이 펼쳐졌다. 우리가 조금 전 걸었던 실타래 같은 나무 데크 길과 에메랄드빛 호수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플리트비체는 요정들이 정성껏 가꿔놓은 정원 그 자체였다. 약 20분을 더 걸어 마침내 출발지였던 1번 입구로 돌아오며 우리의 B코스 대장정은 막을 내렸다.

(하늘에서 본 요정의 정원, 다시 돌아보는 인생의 궤적)


우리 삶의 ‘하부 호수’를 지나는 법


주차장으로 돌아와 차에 오르며 아내의 얼굴을 보았다. 조금은 피곤해 보이지만, 눈빛만큼은 어린아이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플리트비체의 호수들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끊임없이 흐르며 폭포를 만들고, 다시 잔잔한 호수를 이룬다. 우리 부부의 삶도 대기업이라는 거대한 폭포(벨리키 슬랩)를 지나 이제는 잔잔하고 투명한 하부 호수의 구간을 지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폭포가 떨어질 때의 굉음은 무서웠지만, 그 아래 고인 물은 그 어느 곳보다 평온하고 영롱했다. 은퇴라는 이름의 낙차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 두려울 때도 있었지만, 오늘 플리트비체가 보여준 풍경은 내게 속삭이는 듯했다. 어느 구간에서든 멈추지 않고 흐르기만 한다면, 삶은 매 순간 요정의 숲처럼 신비로울 수 있다고 말이다.


- 낭만봉지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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