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와 문장, 김연수 < 지지 않는다는 말 >
“다 부질없어 보였어.”
내 생각에 청춘의 시간이 꼭 그렇게 흘러간다. 열심히 뭔가에 빠진다. 그다음에는 갑자기 다 부질없어 보인다. 왜 20대에는 제대로 산다는 느낌이 잘 들지 않고, 모든 게 갑자기 부질없어 보이는 것일까? 그건 어쩌면 20대에는 결과는 없고 원인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196p
마흔의 시간을 넘기고 나니, 순간순간 부질없어 보이는 것들이 많아진다. 돌아보면 20대라고 다르지 않았다. 체력 하나가 밑천이었던 시절. 안되면 밤을 새서 하면 그만이던 시절. 늘 성공하고 싶었고 자주 사랑을 얻고 싶었지만, 또 금방 무기력해졌던 마음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한 명의 아이도 부담스러웠던 나는 결국 세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영화감독이 꿈이었던 남편은 이제 넷플릭스와 주말에 한 몸이 되는 중년의 직장인이 되었다. 인생이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조차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내 인생 계획에 없었던 세 아이를 바라보며 다시 한 번 피식 웃게 된다.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우리를 도와줄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게 원하지 않고 20대를 보내는 사람도 있을까? 그럼에도 20대가 끝날 무렵에 우리 대부분은 알게 된다.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더 지질하며, 자주 남들에게 무시당하며, 돌아보면 사랑하는 사람조차 없다는 사실을. 196-197p
어디 20대뿐일까. 학교 수학 숙제에 쩔쩔매는 둘째의 모습이 그날따라 왜 참을 수가 없었을까. 참지 못하고 폭발한 이유는 낮에 받은 직장에서의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스스로를 변명해 보지만, 엄마가 맨바닥의 민낯을 드러냈던 날. 약자인 아이는 부모의 거칠고 모진 행동에 저항도 못한 채 서 있기만 했었다. 부족한 것은 아이가 아니라 엄마인 나였는데 잊고 싶지만 절대 잊을 수 없는, 생각보다 훤씬 지질한 기억이다.
20대가 지난 뒤에야 나는 어떤 사람이 아니라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해야만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제야 나는 최고의 작가가 아니라 최고의 글을 쓰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기 시작했다. 최고의 작가가 되는 건 정말 어렵지만, 최고의 글을 쓰는 사람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매일 글을 쓰기만 하면 된다. 198P
마흔의 기록을 시작으로 ‘오십의 기록’을 ‘예순의 기록’을 이어가자고 적어본다. 40대에는 흔들리지 않는 ‘불혹’이 되고 싶었는데, 마흔을 ‘불혹’이라고 부를 수 있는 어른은 결국 공자뿐이라는 것을 마흔이 넘어서야 알게 되었다. ‘오십의 기록’에는 여전히 아이들의 이야기가 대부분이고, 정직하게 일을 하며 틈틈이 글을 쓰는 이야기가 있기를. ‘예순의 기록’에는 하루종일 책을 읽고, 졸고, 필사를 하는 일상을 보내다가, 어느 날 그리운 친구를 만나러 제주도로 훌쩍 떠나는 기록도 남길 수 있다면 좋겠다.
어쩌면 우리가 소원을 말하는 방식이 잘못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정말 사랑한다면, 결혼이 아니라 아낌없이 사랑할 수 있기를 원해야만 할 것이다. 결혼은 어려울 수 있지만, 아낌없이 사랑하는 건 크게 어렵지 않다. 그건 내 쪽에 달린 문제니까. 마찬가지로 마라톤 완주가 아니라 매일 달리기를 원해야만 한다. 마라톤을 완주한냐, 실패하느냐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매일 달리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다. 할 수 없는 일을 해낼 때가 아니라 할 수 있는 일을 매일 할 때, 우주는 우리를 돕는다. 199p
소원을 비는 우리의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말에 생각이 멈춘다. 그렇지. 결과가 아니라, 지치지 말고 멈추지 말고 그저 꾸준히 할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빌었어야 했다는 걸. 오늘부터, ‘잘’ 쓰는 것 말고 ‘꾸준히’ 쓸 수 있는 용기를 가지자고. 부족하고 재능 없는 나를 끌어안고 다시 브런치에 기록을 남겨보자고 용기를 내 본다.
아무도 이기지 않았건만, 나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 작가의 말
지지 않는다는 말, 그 말은 반드시 이긴다는 걸 뜻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 작가는 “지지 않는다는 말”의 의미를 이렇게 정의했다. '이기는 것’이 아니라 '지지 않겠다’는 다짐이 오히려 마음을 단단하게 만든다. 같은 나이대의 작가가 인생의 깨달음과 통찰이 담긴 글을 이렇게 때마다 성실히 출간해 줘서, 나는 늘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문장이, 그의 통찰이 언제나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도 그저 감탄할 뿐이다. 역시, 김연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