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때로 개구진 행복 4

행복 순간포착

by 봉림숲

때때로 개구진 행복 4


딸의 냉정한 평가

아내가 외출을 하려고 옷장을 이리 뒤지고 저리 뒤지더니 마침내 치마 두 벌을 꺼냈다. 두 벌 중 어떤 치마를 입어야 할지 여전히 결정을 못 하고 있었다. 하나씩 번갈아 입어보며 어떤 옷이 예쁘냐고 물어본다. 옆을 지나가던 딸이 한마디 내뱉고 지나갔다.

“치마 입는다고 다 예쁘나?”



반달

당일 가족 번개여행으로 포항 영일대해수욕장에 놀러 갔다. 아내와 나, 아들과 유쾌한 딸은 밤까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밤바다의 파도는 파도가 친다기보다는 미세하게 일렁이는 물결이었다. 우리는 길게 뻗은 해수욕장, 파도가 숨을 헐떡거리다 지쳐 물러서는 해안가 모래사장을 걸었다. 아들과 딸은 깔깔거리며 모래사장을 뛰어다니며 서로 장난을 쳤다. 밤하늘에는 반달이 화려하지 않은 노란색으로 가깝게 내려와 있었다.


아내가 “달이 참 예쁘네. 우리 예진이 닮았네!”

라고 하니, 딸이 바로 반박했다.

“엄마! 내 얼굴이 저렇게 반쪽이란 말이야?”



월드컵 예선전

월드컵 예선전 경기가 있던 날 밤이었다. 늘 그렇듯이 국가대표팀 경기만 응원하게 되면 광분을 하게 된다. 전반전과 후반전 내도록 무승부를 유지한 채 답답한 경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혼자서 씩씩대기도 하면서 얼굴은 붉그락푸르락하면서 그야말로 나라 잃어 울분을 터뜨린 수준이다. 내 안에 숨겨진 온갖 포악한 성질은 다 튀어나오는 듯하다. 다행히 상대방의 자책골로 겨우 1대 0으로 경기를 이겼다.


그 시간 동안 딸은 거실 한 구석에서 한자공부를 하고 있었나 보다. 딸이 물었다.

“아빠, 우리가 이겼어?”

잔뜩 상기된 얼굴로 “응”이라고 짧게 대답했더니, 딸은 이 말을 중얼거리고는 한자공부를 계속했다.

“축구 보는 사람이 힘든 건지, 축구하는 사람이 힘든 건지 모르겠네.”



딸의 근거 있는 반박

아내가 딸을 위해 늦은 밤에 비빔라면을 만들고 있었다. 거실에 나와보니 둘은 벌써 말싸움을 한번 한 거 같았다. 아내는 간식을 만들면서 딸에게 '아빠를 닮아서 비빔라면만 먹는다'라고 잔소리를 했다. 우리 집에서 딸과 나는 비빔라면을 좋아하지만 아내는 좋아하지 않는다.


아내는 아들과 본인은 착한 성품이고, 딸과 나는 별나고 못된 성격이라고 투덜거렸다. 그 소리를 듣고 있던 사춘기 딸이 바로 반박을 했다.

“남을 낮추고 자기를 높이는 게 어떻게 착한 사람이야?”

아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분주하게 자기 일을 했다.



속털 빠져나간 패딩은 사랑으로 채워지고

2년 전쯤 할인매장에서 행사 상품인 패딩을 이만 원 주고 샀다. 가볍고 편해서 농장에서 일을 할 때나 등산 갈 때 자주 입었다. 자주 입다 보니 소매가 조금 터지는 바람에 속털이 그곳으로 자꾸 삐져나와 날렸지만 버리기가 아까워서 공업용 테이프로 그냥 붙여서 입고 다녔다. 어느 날 딸이 공업용 테이프를 붙여놓은 그 패딩을 폰 카메라로 찍어서 아내에게 문자를 보냈다.


“엄마! 나 돈 보탤게. 아빠 패딩하나 사주지?”

“찢어져 있던데 얇고 추워서 아빠 못 입고 다닌다.”

“요즘 춥구먼! 패딩 진짜 얇더라. 찢어진 거 테이프로 붙여놓은 거 방금 봤는데!”


딸은 그동안 모아놓은 용돈 다 털어서 아빠 패딩을 사줄 생각을 했던 거다. 집에 와서 딸을 사랑스럽게 안아줬더니 대성통곡을 하며 서럽게 운다. 마음이 많이 아팠다고 한다. 사춘기라 나한테 무뚝뚝하게 대하더니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딸의 마음은 추위를 막아주는 패딩보다 더 따뜻했다.



옷의 가치

오늘 양복 입은 내 모습을 보고 아내가 멋있다고 칭찬을 했다. 할인매장에 가서 한벌 15만 원 주고 저렴하게 샀다. 어제 결혼식에 갔었는데 결혼식에서도 새신랑 같다는 얘기를 아내와 같이 들었다. 아내는 그럴 때면 살짝 기분이 상하기도 한다.


아내는 한참 칭찬하고 나서는 ‘당신은 어떤 옷을 입어도 멋있으니 싼 거 입어야 하고, 나는 어떤 걸 입어도 잘 안 받쳐주니 비싼 옷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아니야! 당신은 뭘 입어도 예뻐! 싼 옷 입어도 될 거 같아!”라고 얘기해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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