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성, 너도 연습하면 되는구나
최근 세계 대학교육의 혁신 사례로 꼽히는 ‘미네르바 스쿨’. 학생들은 샌프란시스코, 서울, 베를린, 런던, 부에노스아이레스 등 전 세계 주요 도시에 있는 기숙사를 3~6개월마다 옮겨 다니며 온라인으로 수업을 듣습니다. 각 도시에서는 기업ㆍ기관ㆍ시민단체 등에서 인턴 활동과 프로젝트를 통해 현실사회를 경험합니다. 전 세계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과 함께.
교육혁신 모델로 주목 받고 있는 이 미네르바 스쿨(https://www.minerva.kgi.edu/)의 핵심 가치는 무엇일까요. 그 기원은 또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미네르바 스쿨은 21세기판 ‘그랜드 투어’의 한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조기 유학과 해외여행의 원조로 꼽히는 《그랜드 투어》(설혜심 著, 웅진지식하우스, 2013년)의 메시지를 살펴 보았습니다.
이 책을 쓴 설혜심 연세대 교수(사학과)는 “좀 더 실질적 차원에서 해외 유학의 득과 실을 따져봄으로써 과연 해외 유학이 떠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를 판단해보고 싶었다”라고 저술 의도를 밝혀 놓았습니다.
그럼, 17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그랜드 투어의 본래 모습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보통 여행 기간을 3년으로 정했다면, 처음 18개월은 프랑스에서, 그 다음 9~10개월은 이탈리아에서, 그 다음 5개월은 독일과 네덜란드에서,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4~5개월은 파리에서 보내는 일정이었다고 합니다.
그랜드 투어의 궁극적인 목적지는 로마였어요. 르네상스 휴머니즘의 영향으로 고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당시 유럽에서 로마는 여행자들이 보아야 할 모든 것을 함축하는 곳이었습니다. 1786년 로마에 도착한 작가 괴테는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 같다”고 감동을 나타내기도 했죠.
괴테는 로마에서 색다른 구경거리를 찾았습니다. 한 토론회였어요. “라틴어 시 몇 편이 낭독되고 30명가량의 신학도들이 한 명씩 차례로 등장해 각자 모국어로 짤막한 시를 낭송했다. 말라바리아어(인도 남부 지방의 언어), 알바니아어, 터키어, 루마니아어, 불가리아어, 페르시아어, 포가시아어, 히브리어, 아랍어, 시리아어, 이집트어, 바르바리어, 아르메니아어, 이베리아어, 마다가스카르어, 아이슬랜드어, 보헤미아어, 그리스어, 이사우리아어, 에티오피아어, 그리고 그밖에도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많은 언어들이 쏟아져 나왔다.” - 127쪽
괴테는 낯선 장소에서 낯선 사람과 낯선 경험을 통해 그 문화적 다양성에 흠뻑 빠져들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랜드 투어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교사가 여행 전체를 책임지고 어린 청년의 여행에 동행했다는 점입니다. ‘그랜드 투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리처드 러셀스는 자녀를 해외로 유학 보낼 때 부모가 가장 신경 써야 할 일은 좋은 동행 교사를 구하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동행 교사 중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지성도 있었죠. 토머스 홉스, 로크, 애덤 스미스를 비롯해 저명한 역사학자인 애덤 퍼거슨 등 영국 문학계와 사상계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들입니다.
이들은 여행을 하면서 기초적인 교양 과정을 직접 가르쳤습니다. 언어와 수학, 역사, 지리, 과학 등을요. 제자의 도덕과 종교를 감독하는 역할도 했고, 여가 시간에 읽어야 할 독서 목록까지 일일이 챙겼습니다. 그야말로 ‘교육 여행’인 것이죠.
그랜드 투어는 본질적으로 여행과 교육을 결합시켜 사춘기 소년들의 비행을 막고 올바른 성장을 도모하려는 기획이었다고 합니다. 평균 연령은 18세쯤이었다고 하네요.
그랜드 투어의 이점은 시야가 넓어져 사회에 잘 적응하고 공직 수행에 필요한 여러 자질을 훈련받았다는 점입니다. 리처드 러셀스가 해외 유학의 효과로 꼽은 내용을 보면, 그랜드 투어에 기대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책에서 읽고 배우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게 많이 배울 수 있다, 부모의 보호에서 벗어나 고생을 해봐야 성장하게 된다, 우물 안에서 가장 잘난 줄 알던 사람은 더 넓은 땅에서 수많은 훌륭한 사람을 만나봐야 훨씬 겸손해지고, 아랫사람들을 배려할 수 있게 된다, 여행을 해야만 많은 언어를 배울 수 있고, 그래야만 다른 나라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다, 그리고 유명한 이들이 이미 다녀왔기 때문이라고 하는군요.
맨 마지막 이유가 눈에 띕니다. “현실적으로 위인들과 왕족들이 다 다녀왔다는 사실이야말로 그랜드 투어를 통해 얻고자 하던 핵심적인 효과가 아니었을까. 여행의 내용과는 관계없이 일종의 통과의례로서 엘리트의 온전한 정체성을 갖추는 데 필수적이라는 이야기다.” - 315쪽
그랜드 투어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큰 비용과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감행했던 그랜드 투어의 효과에 대해서는 이미 16세기부터 극단적으로 양분된 견해가 존재했습니다. 해외 유학의 득과 실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던 것이죠. ‘영국에도 좋은 대학과 스승이 있는데 굳이 외국에 나가서 새로운 환상을 좇는 것은 불필요한 열등감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었으니까요.
그랜드 투어가 표방했던 ‘여행을 통한 교육’은 매스 투어리즘 시대에도 완전히 사라지거나 중단된 것은 아니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그랜드 투어의 핵심적 프로그램인 외국어 교육은 사실 중세까지 그 기원이 거슬러 올라간다. 라틴어와 프랑스어 등 외국어 습득은 그들이 유학을 통해 성취하고자 하는 제일 요소였다. 이 전통은 그랜드 투어로 이어졌고, 오늘날에는 어학연수나 교환학생 제도가 그 목적을 계승하고 있다.” - 365쪽
유럽의 그랜드 투어는 인류가 출현한 후 계속해 온 여행의 역사, 그 도도한 흐름의 중간쯤에 걸쳐 있는 한 형태로 보아야 한다는 게 저자의 설명입니다.
여행은 계속됩니다. 미네르바 스쿨도 그 여행 속에 있겠지요. 그랜드 투어의 의미는 해외여행을 떠나라는 것이 아니라, 생생한 현실사회의 ‘현장’에서 낯선 ‘경험’에 나서라는 메시지가 아닐까요.
이 글은 교육부 웹진 <꿈트리> '진로명저' 코너에 실었던 필자의 글을 재구성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