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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봉이 Nov 27. 2023

아들이 끓인 라면과 아부지


아들은 초등학교 3학년 때에 두렵고 멀기만 하던 '불'을 안전하게 사용하는 법을 배웠다. 불은 안전하게 잘 사용하면 더없이 이롭지만 잘못 사용하면 더없이 위험하다는 말을 시작으로, 아빠에게 가스렌지 사용법과 함께 맛있는 라면을 끓이는 법(라면을 맛있게 끓이는 법이 아님)도 실습으로 배웠다. 오빠가 배우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는 동생은 늘 오빠보다 1년 일찍 배운다.


엄마, 아빠가 아주 가끔씩 별식으로 끓여주는 라면만 먹던 아들은 이제 혼자서도 라면을 끓인다.


아직은 엄마나 아빠가 함께 있을 때만 허락을 받았지만 컵으로 물을 헤아리고 시간도 재어가면서 곧잘 끓인다. 그야말로 포장지 매뉴얼에 충실한 라면맛이 난다. 살짝 그때 그 시절 추억의 맛도 난다.


"아빠! 아빠! 오늘은 내가 라면 끓여 드릴게요"


엊그제 농협마트에 가서 오랜만에 라면을 사다 놓았더니 먹고 싶었던가 보다.


"그래~ 그럼 아들이 끓인 라면 한 번 먹어 볼까"


라면용 양은냄비는 꽤 몇 년 되어서 이리저리 찌그러지고 군데군데 그을음 때도 타서 맛이 좋다. 양은냄비 특유의 가벼운 달그락 소리가 몇 번 나고 좀 있으니,


"아빠! 이제 물이 끓었어요, 라면 넣어요"

"아빠! 이제 한 번 저어줄게요"

"아빠! 이제 시간 다 되었어요, 나오세요"


아들이 끓인 라면을 먹으면서, 아들이 끓인 라면을 드시던 아부지 생각을 한다.


그러고 보니 나는 언제 누구에게 라면 끓이는 법을 배웠는지 아무런 기억이 없다.

어떻게 배웠을까? 엄마에게 배웠을까? 아부지에게 배웠을까?

동생 OO이가 그렇듯이 아마도 누야(누나)나 성(형)이 배울 때 덤으로 배웠거나, 누야나 성이 라면을 끓일 때 보조노릇 야단 들어가면서 배웠으리라 짐작만 될 뿐이다.


어쨌든 나도 지금의 아들 나잇적에 라면을 끓일 줄 알았던가 보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먹을 것을 찾아 정지(부엌)에 들어갔더니, 곤로 옆 오봉에 라면 한 봉지와 쇠젓가락 두 짝, 그리고 양은 주전자와 함께 엄마의 쪽지가 있다.

(사실은 쪽지가 있었던 것인지... 아침에 학교 갈 때 신신당부를 들었던 것인지 확실치가 않다, 어쨌든)


'봉아 학교 갔다 와서 아부지 일하시는 정골 논에 새참 갖다 드려라. 라면 하나 끓여서 니도 좀 묵고 아부지 갖다 드려라'


화랑표였는지 비사표였는지 기억이 잘 안나는 커다란 통에 든 성냥으로 곤로에 불을 붙이고, 주전자에 라면을 끓여서 정말 조금만 먹었다. '좀 더 먹어도 되겠지' 하면서 한 두 젓가락 더 먹었다.


그리고선 주전자 주뎅이에 쇠젓가락을 꽂고서 딸그락거리며 정골 논으로 향했다.

어른의 빠른 걸음으로도 십오 분은 너끈한 거리이다. 아이의 걸음이니 얼마나 걸렸을까. 가는 도중에 맛있는 라면의 유혹에 한두 번쯤은 넘어갔던 것 같기도 하고...


이랬으니 주전자 속의 라면 사정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말해 무엇하리.

정골 논에 도착하였지만 아부지는 보이지 않고 저 짝에서 '이랴~ 이랴~ 워~ 워~'하는 소리만 들린다.


라면 주전자를 들고 아슬아슬 논두렁을 따라 소리 나는 쪽으로 돌아가보니 무논에 철벅철벅 온통 뻘투성이가 된 아부지와 누렁이가 써레질을 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 다랑논 써레질하는 농부와 누렁이, 남해 가천다랭이마을 ⓒ밤이슬이(http://blog.naver.com/pms8206/)


"아부지~ 새참 드시고 하이소예"

"이랴~ 이랴~ 어이! 이노무 소야 힘 좀 내라"

"아부지이~ 라면 드시고 하이소예~"

"워~ 워~... 뭐라꼬?"

"라면 드시라꼬예"


논물로 대충 손과 얼굴에 뻘을 씻으시고 아부지는 후루룩~ 후루룩~ 라면을 드셨다. 라면을 끓여 온 어린 아들을 칭찬했다든지 대견스러워했다든지 하는 기억은 없다. 젓가락으로 집기도 어려웠을 그 불어 터진 라면을 아부지는 참으로 맛있게 드셨다.


그때는 라면이 양이 적다거나 불어 터졌다거나 그런 것은 알지 못했다. 한참의 세월이 지나고 혼자서도 한 봉지 반을  먹어야만 겨우 양이 찰 무렵에서야 그런 생각을 했었지만, 나는 늘 투덜대기만 했다.


'에이! 요새 라면은 양이 왜 이리 적어... 옛날에는 한 봉지로 세 명도 먹었는데'


나는 정골 논 가던 길에 입맛 다시며 뚜껑을 열어 본 주전자 속 가득했던 라면이 불어서 그랬던 것이라는 생각은 할 수가 없었다, 그때 아부지가 라면을 너무나 맛있게 드셨기 때문에.


아들도 이제 아버지가 되어 아들이 끓인 라면을 먹는다. 엄마가 끓인 라면 보다도 아빠가 끓인 것 보다도 더 맛나는 아들이 끓인 라면을 나는 아부지처럼 그렇게 맛있게 먹을 수가 없다. 괜히 또 애맨 라면 탓만 한다.


'에이! 요새 라면은 왜 이리 맛이 없어'



#제목글 #아들이끓인라면과아부지 2011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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