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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감보라 Aug 08. 2023

"이봐, 해봤어?" 나는 꿈을 위해 6년을 투자했다.

​안될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1.     이 직업은 안 되겠다.! / 2009년

  고객을 만나는 일은 즐거웠다. 서비스직은 나에게 잘 맞았다. 실적은 올라가고 회사에서도 인정해 주고 급여도 많이 받게 되었다. 손님이 뜸한 오후에 휴대폰 매대에 기대어 서서 생각했다. “이 일이 좋고 재미있고, 적성에 맞는데… 3년 후에는 대리가 되는 건가? 과장으로 승진도 할 수 있나? 휴대폰만 계속 판매하면 성장할 수 있나?”  이런 생각을 해보니 판매 실적, 고객을 만나는 즐거움, 월급을 빼면 남는 것이 없다고 느껴졌다. 갑자기 조바심이 생겼다.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일은 무엇인가?”


[ 사람을 편하게 해 주고 고민을 잘 들어주는 것 ]이었다. 속으로 살짝 비꼬면서 “와! 대단한 것 찾았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스스로 에게 말했다. 대단한 것을 찾은 것은 아니지만 나는 '상담'이라는 단어를 떠 올렸다. 상담 공부를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바로 온라인으로 사이버 대학을 알아봤다. 일을 하면서 공부도 할 수 있고 등록금도 일반 대학보다 저렴했다. 몇 군데 사이버대학 홈페이지를 가서 둘러보고 비교도 해 보면서 마음에 드는 곳으로 원서접수를 하고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2.     사이버대학 상담심리학과  /  2009년 3월 ~ 2011년 8월

  처음 보는 심리학 단어들은 어려웠다. 학자들의 이론은 비슷해서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다. 일을 하면서 기한에 맞추어 과제, 수업, 시험을 보는 일은 빠듯했다. 공부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못한 아쉬움도 늘 따라다녔다. 혼자서는 수업을 듣는 것이 불안해 같은 학과 모임에 나가면서 정보도 얻었다. 그렇게 졸업을 하게 되었다. 

 

 

3.     상담심리학과 졸업 후  / 2011년 9월 ~ 2012년 5월

  사이버 대학 졸업 후 상담 관련 직장을 찾기 위해 구인사이트를 꼼꼼히 봤다. “드디어 상담 관련 일을 할 수 있는 것인가?” 생각했다. 현실은 냉혹했다. 하지만 충분히 이해되었다. 상담심리 박사를 졸업하신 분들도 많은데 굳이 나에게 일자리를 줄 이유는 없었다. 직업은 포기하고 시간단위로 라도 상담 관련 일을 하고 싶었지만 이력서를 제출할 곳조차 없었다. 경력도 전혀 없고 공부도 덜 된 나를 채용한 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상담을 하기 위한 가장 빠른 길은 사회복지사 2급을 따는 것이었다. 2급을 따기 위해서는 실습(160 시간), 이론필수 17과목, 전공필수 10과목, 전공선택 7과목을 이수해야 했다. (2022 기준)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사회복지 공부는 많은 흥미를 느끼며 열심히 공부했다. 필기를 하고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다시 돌려 들으며 공부했다. 특히 아동복지학 공부를 할 때 많은 깨달음을 얻고, 행복했다. 일이 끝나고 지역아동센터에 실습을 갈 때도 아이들을 만 날 생각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실습, 과목 이수가 완료되자 사회복지사 2급을 취득할 수 있었다.

 

4.     나도 사회복지사 / 2012년 11월 ~ 2013년 06월

  사회복지사 2급을 취득하고 다시 구인사이트를 살펴봤다. 지역아동센터에서 일을 하고 싶어 이력서를 넣었다. 합격 메일이 왔다. 센터에서 아이들을 만나는 일은 정말 즐거웠다. 아이들의 수업 시간표를 다시 짜고, 예산도 아이들에게 유용한 방향으로 지출할 수 있도록 많은 고민을 했다. 상담공부를 더 깊게 하고 싶었다. 대학원에 간절하게 진학하고 싶었다. 영어실력이 기본인 것처럼 적힌 대학원 모집요강만 보면 나는 기가 죽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으면 길이 보이고 열린다. 지원할 수 있는 대학원을 찾아 원서를 넣었다. 면접 준비를 위해 자기소개를 작성하고 글로 적어 시간이 날 때마다 외웠다. 자기소개를 외울 때 지역아동센터 아이들을 생각하면 감정이 조절이 되지 않아 목이 메었다. 결국 면접에서 자기소개를 하면서 우는 사람이 되었고 합격하지 못했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되었다. 며칠 후 전화가 왔다. 추가합격이 되었는데 등록을 원하는지 물었다. 등록을 하려면 등록금을 납부해야 한다고 했다. “아아~~ 고맙습니다. 등록금 바로 내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때의 감정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5.     나도 대학원 학생 / 2013년 9월 ~2015년 8월

  대학원 OT에 갔다. 입구에서 내 이름이 적힌 목걸이 이름표를 찾았다. 보이지 않았다. (대학원 합격을 했음에도)“그래 합격하지 않은 것이겠지… 내 이름을 못 찾겠네…”라고 생각했다. 맨 아랫줄 왼쪽에서 내 이름표를 찾았다. “아… 나도 여기에 들어갈 수 있구나…” 하며 큰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대학원에 입학한 후로 2년 동안 초등학교 상담사 공고에 이력서를 냈다. 면접을 볼 때마다 떨어졌다. 2주, 1달 일 할 수 있는 곳도 들어갈 수 없었다. 버스를 타고 가며 “저 초등학교에는 어떤 상담사가 있을까? 나도 아이들을 정말 사랑하고 잘할 수 있는데 왜 몰라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면접에 떨어질 때마다 옷, 헤어 스타일도 바꾸어 보았다. 담담히 지내 오다 샤워를 하며 눈물 흘린 적도 있었다. 어떻게 더 노력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렇게 초등학교 상담사가 되지 못한 채 학교를 졸업했다. ‘전문상담교사’ 자격증을 받았을 땐 안정감이 느껴졌다.

 

6.     드디어 초등학교 전문상담사가 되다.  /  2016년 3월~ 2021년 10월

  2016년 2월에 많은 학교에서 전문상담사 교육공무직을 채용했다. 47개의 학교에서 채용공고가 나왔다. 47세트의 이력서를 출력하고 남편의 차를 빌렸다. 남편은 동료의 차를 얻어 타고 출퇴근을 했다. 그때 나는 초보 운전이었다. 신호등에 맞추어 서는 것조차 어색하고 식은땀이 났다. 학교에 주차를 하고 나면 주차의 기술이 부족해 기운이 쭉 빠졌다. 이력서를 들고 걸어갈 때는 긴장되고 힘든 표정을 풀고 웃으며 생기를 불어넣었다. 그렇게 3곳의 학교에 이력서만 내도 기운이 다 빠졌다. 점심에는 차 안에서 햄버거를 먹고 오후에 다시 이력서를 제출했다. 하루에 10개가 넘는 학교에 이력서를 제출했다. 3일째 되는 날 오후는 도저히 힘이 나질 않아 이력서 제출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힘을 내 돌리고 4일째에는 동생에게 운전을 부탁했다. 그렇게 47개의 학교에 이력서를 넣었다. 이력서가 통과된 학교에서 연락이 와 몇 개의 면접을 보았다. 면접을 본 학교에서 연락은 오지 않았다. 한 초등학교 면접에서 이런저런 질문을 하시더니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왜 아직 좋은 소식을 못 들었나요?” 질문을 듣고 면접용 표정이 무너지면서 눈물이 났다. 머리가 하해지면서 눈물에 대한 사과만 하고 있었다. 면접관은 괜찮다고 하며 오늘은 두 다리 쭉 펴고 자라고 하셨다. 집에서 생각해 보았다. “두 다리 쭉 펴고 자라고…? 희망고문을 하시나…” 하고 이틀 후에 그 학교에서 합격 전화를 받았다. 나도 초등학교 전문상담사가 되었다. 

 

7.     6년 동안 한 가지 꿈을 위해 달려올 수 있었던 이유

  꿈이 간절했다. 좋아하는 일이었고,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의 가치와 일치하는 꿈이었고, 꿈에 대한 신념이 강했다. 한마디로 초등학교 상담사가 되고 나니 6년이 흘러가 있었던 것이다. 6년 동안 꿈이 이루어지는 날만 생각했다. 안될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8.     새로운 꿈  / 2022년 12월 12일~

 글을 꾸준하게 쓰고 싶다. 단지 그것이다. 그저 글을 꾸준히 쓰고, 꾸준히 공부하며, 글로 사람들과 소통하고 위로, 성장, 사랑을 주고 싶다. 또다시 새로운 꿈을 위해 천천히 간다. 즐기며 천천히 간다. 행복한 꿈이 깃들어 있는 봉우리의 삶. 


안될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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