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론도 특파원 #0

프롤로그 : 사랑하는 이들을 두고 왜 나는 멀리 떠나는가.

by 준휘




워킹홀리데이를 처음 결심했을 때, 나는 그저 단순히 내 삶의 전환점이 필요했었다. 하루하루 뭔가를 메꾸기 위해 살아가는 삶이 내겐 조금 버거웠다. 확실한 것이 필요했는데 예전의 나는 감히 그것을 꿈꿀 수 없었다. 그러다 사람들을 만나고, 애인을 만나고 내 삶은 이전보다 정돈된 길을 걷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특별하진 않아도 조용하게 흘러가는 삶. 가끔 물 위에 꽃잎이 떨어져 춤추다 조용히 가라앉는 그런 삶이었다. 꽃잎과 함께 다른 부유물도 가라앉으니 내 마음속에 남아있던 작은 마음을 발견하게 됐다. 이전에 이루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로 한 걸음 내딛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그 마음을 먼저 발견했던 순간은 애인과 발리에 다녀왔을 때였다. 생애 최고로 긴 비행시간을 견디고 발리에 도착하여 20대가 넘어가고 처음으로 긴 휴가를 보냈다.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던 그들이 매일 신에게 감사를 다 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뇌리에 강하게 남았다. 한국에서 그저 열몇 시간을 날아오면 이런 세상이 있다는 게 새삼 놀라웠다. 그때 나는 ’아, 한국에서의 고민이 또 이렇게 별거 아니었구나. 여기서라면 뭐든 해 먹고살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고 워킹 홀리데이에 대한 마음을 조금씩 구체화해나갔던 것 같다. 승인은 발리를 다녀오기 전에 이미 떨어졌는데 정작 마음을 먹은 건 발리 이후였던 것이다. 그다음부터는 느리지만 확실히 진행됐다. 그 과정이 마냥 순탄치는 않았지만, 결국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남은 나날들을 채워갔고 지금은 그 비행길에 올라있다. 오기 전 신변정리(?) 비슷한 것들을 하며 사람들과 오래도록 천천히 작별인사를 나눴다. 하나같이 마음을 모아 응원해 주는 그들의 마음이 너무도 감사했다. 내가 그래도 헛된 일을 꿈꾸고 있는 게 아니라는 위안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1월을 맞이하고 떠나는 날이 점점 다가올수록 내 마음이 너무 답답했다. 내 주변의 이 좋은 사람들과 환경을 놔두고 왜 떠나려고 하는지 스스로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설레어하는데 나는 걱정만 가득해져 갔다. 지금이라도 취소하는 게 맞을까. 나는 사실 한국이 너무도 잘 맞던 사람인데 본성을 거스르는 게 아닐까 등등 정말 온갖 생각이 들었다. 그중 가장 괴로운 일은 애인과 함께 평화롭게 살던 그 나날들이 이제는 그리워질 날들이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내가 나만 생각하다 우리 관계를 그르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덜컥 두려웠다. 또한 동시에 아직 경험하지 못한 일들로 미리 겁을 먹는 것 또한 경계하고 싶었다. 그래서 결국 남은 날들을 최대한 소중하게 보내기로 다짐했다. 물론 마음먹은 대로 모든 날들을 알차게 보내진 못했지만 최선을 다해보려 노력했다. 그게 내가 던져놓은 말에 대한 나의 예의라고 생각했다.



짧은 그 시간 동안 많은 사람들의 격려와 마음을 받을 수 있어 참 행복했다. 나는 항상 왜 이리 세상이 내게 모질까 생각했는데 어쩌면 세상은 내가 힘들더라도 한발 내딛기를 바라고 있던 게 아니었을까. 마지막 출국날까지 아빠와 재환이, 그리고 애인까지 공항으로 배웅을 나와줬는데 그게 너무 뭉클했다. 전날부터 조금만 건들면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았는데 간신히 참아냈다. 마지막에 입국 수속장을 거치고 진짜 이제 시작이구나 싶어 마음이 묘했다. 사람이 없어 여유롭게 모든 과정들을 마치고 연착된 비행기를 기다렸다. 이내 비행기에 올라 사람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눴는데 생각보다 연착이 길어져서 거의 한 시간을 이야기했다. 한편으론 이대로 결항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그러다 결국 이륙의 순간이 다가오고 상공에서 오롯이 혼자가 됐다. 멋쩍은 마음에 전날 새벽에 함께 밤을 새우며 애인이 뽑아준 사진들을 꺼내보다 왈칵 눈물을 쏟았다. 사진 뒤편에 몰래 남겨놓은 편지를 발견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한참을 울었던 것 같다. 사람들이 너무 그리웠고 애인이 너무 보고 싶었다. 벌써 모두가 그리웠다.



그래도 이제는 돌이킬 수 없었다. 칼을 꺼내 들면 무라도 썰어야 한다고 했던가. 들인 돈이 아까워서라도 토론토 땅을 꼭 밟고 오겠다는 생각이 올라왔다. 인생에서 어쩌면 가장 크게 배팅을 건 순간일지도 모르는데, 시작하기도 전에 일을 그르칠 순 없었다. 그렇기에 지금 여기서 실컷 울지만, 앞으로 남은 날들은 씩씩하게 보내리라 다짐했다. 이 길의 끝에 대체 무엇이 있을지 알 수는 없지만 부디 이 시간들이 훗날 돌이켰을 때 후회 없는 순간들로 남길. 곧 다가올 LA경유를 준비하며 다시 눈을 붙여본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