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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쥴스 Jan 04. 2022

내가 만약 외로울 때면

책이 주는 조건 없는 위로

 ‘듬직한 사람'이어야만 한다는 강박이 있다. 타고난 성향이나 성격이라기보다 놓인 상황이 그랬다. 맞이끼리 결혼하신 부모님, 그리고 나는 양가의 첫째로 태어났다. 자연스럽게 동생들을 보살피는 듬직한 언니, 누나가 되어야만 했고, 부모님은 어린 나의 응석에 관대함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게다가 빠른 년생이라 또래들보다 몸집이 컸고, 학교에서 선생님은 내가 키가 크다는 이유로 성숙한 모습을 보일 것을 기대했다. 성장하는 동안 나는 '당연히' 듬직해야 하는 줄 알았기 때문에 큰 불만 없이 어른들의 기대에 맞추어 내 역할을 잘 수행했다. 사실 듬직한 사람으로 자라는 동안 실보다 득이 컸다. 반장이나 회장 같은 감투를 쓸 기회가 많았고, 첫째이기 때문에 가족들로부터 얻는 특혜도 많았다. 내게 주어진 역할이 힘들다는 인지를 하지 못했고, 또 그런 내 모습이 싫지 않았다.  

 

성인이 되고 나의 약함을 인정하게 되면서, 듬직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짐이 내 삶을 무겁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25년을 부산에서 살았고 처음 타지 생활을 서울에서 시작했다. 나의 첫 자취방은 신대방역 오피스텔 촌에 있는 보증금 500만에 월세 40만 원짜리 원룸. 막내 고모 댁에서 30초 거리에 있었다. 드라마 속에 시크한 커리어우먼을 꿈꿨지만 현실 속 서울생활은 지질함 그 자체였다. 나의 첫 사수는 신입들이 입사 후 6개월도 버티지 못하고 도망간다는 히스테리 노처녀. 거기서 2년을 버텼다. 원형탈모로 머리에 구멍이 숭숭 뚫리고, 하루 걸러 찾아오는 위경련에 잠을 이루지 못하기 일쑤였다. 대학까지 부산에서 마친 탓에 주말에는 만날 사람도 없었다. 혼자 있는 시간이 버겁고 두려웠다. 와중에 돈이 없어서 혼기를 놓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월급의 70%를 적금으로 부었고, 먹고 싶은 걸 못 먹는 제3세계의 안타까운 이야기는 다름 아닌 내 삶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듬직해야 하는 사람 아닌가. 그 누구에게도 힘든 상황을 터놓고 말하지 못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번듯한 대기업에 다니고, 결혼을 전제로 만나는 남자 친구도 있는 멀쩡한 20대 청년이었다. 가장 친한 친구들은 내게 왜 연락을 하지 않냐며 볼맨 소리를 했다. 엄마는 급하게 목돈이 필요하니 내 명의로 대출을 받아달라 하셨다. 작은엄마는 서울에 있는 사촌동생을 챙겨주지 않는다고 서운함을 토로했다. 사촌동생도 본인에게 무심한 나에게 무정함을 느꼈을테다. 정이 많지만 성질이 불같은 막내 고모는 집이 30초 거리에 있는데 왜 연락도 안 하고, 들리지도 않냐며 소리를 질러댔다. 여기에 화룡점정. 남자 친구(현재 남편)는 너는 늘 씩씩해서 좋다며 내 속을 까맣게 타들어가게 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 못 된 걸까. 기댈 곳이 간절히 필요했던 시기에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기대는 나를 더욱 외롭고 지치게 했다.


한 톨의 사족 없이 나의 약한 모습을 품어줄 누군가가 간절하게 필요했다. 이 무렵부터 책을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했다. 내 사정을 말할 사람이 없으니 책 속의 화자들에게 내가 듣고 싶은 말을 듣기라도 해보자 싶었다. 아들러 심리학은 나 자신을 마주 보는 법을 알려주었고, 나보다 더 깊은 외로움을 경험한 작가들의 에세이는 나를 위로했다. 유명한 자서전의 주인공들은 내게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고, 인문학은 나답게 살아도 괜찮다 격려했다. 책과 있으면 머릿속을 탁하게 어지럽히는 부유물들이 가라앉았다. 그렇게 매일 밤 가장 안전하고 따뜻한 공간인 책 속으로 파고들었다. 책은 내게 애인, 베개, 종교가 되어주었다.

 

무생물인 책에게 사람에게서도 느껴보지 못한 특별한 애틋함을 느낀다. 어떤 책은 날 구원했고, 어떤 글은 날 살렸다. 지독한 길치이지만 책이 지탱해준 평정심으로 이 길 저 길 잘 지나왔다. 나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것 같던 나날 내가 필요할 때 언제나 그 자리에 책이 있었다.


마음 여기저기에 생채기가 생긴 날이면 멍하니 책장을 바라본다. 과거에 읽었던 한 권 한 권의 책들을 들여다보면 당시에 내가 느낀 감정과 생각들이 떠오르며 아득해진다. 그간 읽은 책을 모두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내가 읽은 책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음은 분명하다. 혼자 보내는 시간이 풍요로울 수 있음을,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감수성, 내 감정을 스스로 가다듬는 성숙함을 배웠다. 지금은 책에게 더 오래 기댄다. 갈수록 즐길 것이 많아지지만 책이 내게 주는 기쁨처럼 잔잔하고 편안하고 지속적인 것은 아직 찾지 못했다. 그리고 늘 생각한다. 책이 없었으면 나는 아주 많이 외로웠을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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