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MO를 JOMO로 바꾸는 책 읽기
* FOMO : (Fear Of Missing Out) 소외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 JOMO : (Joy of Missing Out) 이 순간에 집중하는 즐거움
육아휴직 중에 나를 가장 괴롭게 만든 건 아기가 아니라 인스타그램이었다. 나와 같은 위치에 있던 여성들이 출산 후에도 승승장구하며 커리어를 키워 나가는 모습을 초조해하며 지켜볼 때, 사회와 단절되어 온종일 집 안에서 아기와 씨름하는 내 모습은 실제보다 더 볼품없이 초라해졌다.
'저 여자는 조부모님의 육아 지원을 받으면서 커리어 단절 없이 일하는데, 나는 지지리 복도 없네. 불행하다'
'저 여자는 아기를 키우면서도 날씬하고 예쁜데, 내 꼴은 왜 이모냥이지. 초라하다.'
'저 여자는 자기가 번 돈으로 갖고 싶은 걸 마음껏 사는데, 난 티 쪼가리 하나 사는데도 남편 허락이 필요하네. 비참하다.'
.....
'죽고 싶다.'
아기가 잠든 후 매일 밤, 빈 속에 술을 퍼붓고 오열했다. 술기운을 빌려 간신히 자려고 몸을 뉘이면 금방이라도 질식할 것처럼 호흡이 가빠지는 날이 늘어갔다. 이 정도로 괴로우면 아기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일을 하면 되지 않냐 할 수 있겠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기가 돌을 맞던 시기에 남편이 백화점 지점장이 되었다. 남편 커리어 측면만 두고 보면 정말 잘된 일이다. 내가 드디어 사모님(?)이 되었다며 가족과 지인들은 축하했다. 대신 육아와 가사는 오롯이 사모님의 몫이 되었다. 남편의 퇴근이 늦어진 것은 물론, 주말, 평일 할 것 없이 언제든 지점에 일이 생기며 버선발로 뛰쳐나가야 하는 대기조가 되었다. 내 스캐쥴을 계획할 수가 없었다. 일은 고사하고 누군가와 커피 한잔 할 수 있는 시간도 낼 수 없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외부 상황들은 받아들이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가장 먼저 SNS를 지웠다. 그리고 인생의 위기마다 나를 구해준 책에게 호소했다. 제발 나 좀 살려달라고.
올해 2월부터 지금까지 약 7개월 동안, 책들에게서 극 진한 정신적 지지를 받으며 또 한 번 생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나는 이 기간을 '자발적 나(ME) 집중기간'라 부른다. 외부의 소음들을 외면하는 것에 그친다면 수동적인 '도피'나 '고립'이 될 수 있지만, 책과 함께라면 능동적으로 나에게 집중하며 주도적으로 삶을 헤쳐나갈 수 있다. 타인의 인생을 바라보며 전전긍긍하던 불안을 나에게로 돌려, 나의 성장과 지적축적에 집중하며 삶의 주도권을 내게로 가져올 수 있었다.
'자발적 나 집중기간'에 책 읽기는 시기, 불안, 우울과 같은 거칠고 뜨거운 에너지를 정제시켜 어제보다 나은 나를 만드는 동력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단순히 재미만을 좇기는 어렵다. 단련, 더 나아가 수련에 가깝다. 물론, 육아만 해내는 것도 경이로울 정도로 대단한 일임을 엄마인 나는 알지만 세상은 육아로 일을 멈춘 엄마의 퇴보를 감안해 주지 않는다. 억울한 마음은 냉정하게 뒤로 하고, 나는 아래 3가지 성장을 목표로 삼고 책을 읽었다.
본업을 하면서 내가 더 잘하고 싶었던 분야의 책을 몰아서 읽었다. 다른 누구와 비교하지 않고, 그저 내가 얕게 알던 내용을 깊이 연구한다는 차분한 마음가짐으로. 본업이 마케터인 나는 지난 7개월 동안 브랜딩 관련 서적을 30권 이상 읽었다. 많은 브랜딩 서적들이 똑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실체가 단단해지면, 브랜딩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퍼스널 브랜딩에 집착한다. 브랜딩이란 '실체'를 바탕으로 최소한 실체와 같거나 실체보다 나은 인식을 만드는 작업이다. 그런데 실체보다 인식, 평판을 만드는 일에 열심이게 되고 실체를 등한시는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퍼스널 브랜딩은 한 개인에 대해 그저 좋은 이미지만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어떤 브랜드가 되어야 하는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 또 어떻게 무엇이 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 SNS 상에 내가, 내 브랜드가 멋있어 보이는 콘텐츠를 생성하는 데 무게를 둘 것이 아니라, 실체에 대한 고민이 먼저인 것이다.
덕분에 '내가 지금 세상과의 연결을 끊고 책 속에 파묻혀 있어도 되는 걸까?' 하는 일말의 불안함이 모두 사라졌다. 많고 많은 브랜딩 서적 중에 딱 한 권만 읽어야 한다면 홍성태 교수의《브랜드로 남는다는 것》을 추천한다. 브랜딩의 기초개념부터 적용 방법까지 쉽게 습득할 수 있으며, 브랜딩 하는 사람의 자세도 배울 수 있다.
아인슈타인이 말했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와 같은 사고 수준으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사고 수준의 우열에 따라 문제 해결 능력, 학습 역량은 차이가 날 수밖에 압수다. 같은 수준의 사고를 반복한다면, 아무리 머릿속에 지식을 많이 욱여넣는다 한들 성장에는 한계가 있다.
어제의 나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사고를 하는 내가 되기 위해 철학서를 정독했다. 독서는 저자의 사고를 따라가는 행위다. 보통의 비문학 책은 다른 작가의 생각을 빌린 인용구, 그리고 흘려 읽어도 전체 맥락을 파악하는데 무방한 구간들이 있다. 그와 비교해 철학서는 오로지 저자의 논리로만 빼곡하다. 쓸데없는 말이 거의 없다. 그러면서도 논리 전개 방식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철학서의 빽빽한 논리를 따라가며, 요약해 가는 과정에서 힘들지만 이전보다 조금 더 집요하게 사고하는 연습을 할 수 있었다.
사실 읽기 너무 힘들고 어려웠다. 읽긴 읽는데 내 삶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에이리 프롬의 이야기는 달랐다.《소유냐, 존재냐》를 읽고는 그간 내가 했던 고민이 ‘소유’와 ‘존재’라는 두 가지 삶의 방식 사이에서 갈피를 잡는 일이었음을 알게 되었다.《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읽고는 홀로 서는 것이 두려워서 나 스스로 포기해 버린 자유와 기회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되돌아볼 수 있었다.
삶이 엉키고 막힐 때를 돌이켜 보면, 언제나 한 치 앞의 부정적인 일이 전부인양 부풀리고 그 안에서 허우적거렸다. 한 보 뒤에서, 몇 시간만 뒤에서 바라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들에 아옹다옹했다. 일상의 감사와 삶의 의미를 생각해 볼 기회를 주었던 책들을 다시 꺼내 읽었다.
먹는 것도 자는 것도 내 의지대로 할 수 없음에 절망을 느낀 날에는 생사를 오가는 수용소 생활을 하면서도 삶의 의미만 있다면 살 수 있다고 알려주는《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었다. 세상이 변하는 속도에 뒤처지는 것 같아 불안한 날에는 사색하고, 금식하고, 기다릴 줄 아는 능력으로 삶의 경지를 깨닫는《싯다르타》의 이야기를 읽었다. 다 버리고 훌훌 떠나고 싶은 날에는 인도에서 방랑하며 내 고집을 내려놓고 상황을 받아들임을 배워가는 류시화 시인의 《지구별 여행자》를 읽었다.
이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었는데, 신기하게도 내 상황이 힘드니 더 진하게 읽혔다. 머릿속으로 이해하는데 그치는 독서가 아니라, 진짜 내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느낌이랄까. '고난이 책을 읽게 만들고, 조금 더 성숙해질 기회를 주는구나.’ 싶었다.
'자발적 나 집중기간'을 지나온 지금, 나는 내가 원하던 모든 것을 현실로 이루었다. 프리랜서로 마케터로서 프랜차이즈 외식 브랜드의 브랜딩리드를 맡게 되었고, 운영하던 독서 커뮤니티는 교육회사로 Pivot 하고 사업자 등록까지 마쳤다.
사실, 커리어 측면보다 훨씬 더 귀한 것을 지켜냈다. 매분매초 자라나는 아기의 성장을 곁에서 지켜보고 뜨겁게 집중하며 사랑한 시간이다. 사람이 죽는 순간에 살면서 가장 강렬했던 기억들이 한 편의 영화처럼 스쳐 지나간다고 한다. 내가 생을 마감하며 눈을 감는 날, 영화의 첫 장면은 분명 아기와 온종일 함께 했던 초보엄마 시절의 모습일 테다. 한 생명체에게 내 모든 노력과 사랑을 쏟아붓고, 동시에 아기에게서 무조건적인 신뢰와 사랑을 받는 일. 이 경험 덕분에 나는 ‘사랑’이 사람을 살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주는 막대하고 우리 인간은 궁벽한 곳에 있는 작은 행성에서 눈 한 번 깜박할 순간 동안을 살아가는 아주 작은 존재다. 우리처럼 작은 존재가 이 광대함을 견디는 방법은 오직 사랑뿐이다.
《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을 위하여』샤샤세이건
사랑하는 나를 지키기 위해 읽었고, 그렇게 읽은 책은 아기와 보내는 소중한 시간을 사랑하게 해주었다. 돌아보니, 내삶이 비틀거리는 시기들의 공통점은 나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고 내 삶을 긍정하지 못했을 때다.
책으로 부터 받은 지지를 지렛대 삼아, 다시 세상에 나를 표현하기 시작해야 하는 지금. 과거의 나처럼 잊혀질까 뒤쳐질까 두려움에 떨고 있을 그녀들에게, 내가 읽고 쓰며 배운 것을 모두 꺼내어 나누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