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님, 육아하면서 사회적 지위가 낮아진다는 게 가장 힘드실 거예요. 아기를 보는 건 부차적인 문제예요."
일과 육아를 동시에 멋지게 해내고 있는 본느샹스 멤버분께서 말씀하셨다.
사회적 지위란 무엇일까. 지위가 낮아진다는 게 왜 힘든 일일까.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은 그의 저서 <불안>에서 지위를 '사랑을 얻는 열쇠'라고 정의했다. 실제로 지위는 우리가 얼마나 많은 인정과 사랑을 받을 수 있는지 결정한다. 안타깝게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직업이 주부인 사람을 향한 인정은 박하디 박하다. 지위를 결정하는 명예, 권력, 재력과 같은 조건들에서 멀어지기 때문이다. 사랑받고 싶은 욕구는 인간이 가진 본능이다. 본능적인 욕구를 채울 수 없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자리(=지위)는 우리가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는지 결정한다. 이 자리는 우리에게 전례 없는 중요성을 가지게 된 일용품, 즉 사랑을 얻는 열쇠다.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자신의 인격을 신뢰할 수도 없고 그 인격을 따라 살 수도 없다. - 알랭 드 보통 <불안>
임신 초기에 이런 일이 있었다. 한 지인이 (멀쩡하게) 직장생활을 하는 나에게 '아기 낳고도 할 수 있는 일'을 소개해주겠다 제안했다. 시간 제약을 받지 않고,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덧붙이면서. '그냥 일'과 '아기 낳고도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다른지 궁금했다. 크게 관심은 없지만 일단 들어봤다. 그 일은 공간을 예약하고 관리하는 단순 아르바이트였다. 지금까지 내가 쌓아온 커리어와 전혀 관련이 없는 일. 꼭 내가 아니어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 감기는 눈을 힘겹게 떠가며 읽은 책들이 필요하지 않은 일. 난이도, 페이, 만족도 등 높이로 가늠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낮은 일.
왜 세상은 결혼하고 아이가 있는 여성은 '당연히' 소극적으로 일하고 싶어 할 거라 넘겨짚을까. 가정과 일,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할까. 냉정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이건 사회적 통념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엄마가 된 여자들이 스스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의 크기를 작게 정의하고 한계를 지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외항사 승무원으로 일하며 세계를 누비던 친구 Y는 출산 후 승무원 학원에서 영어 수업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억대 스캐일의 오프라인 광고를 기획하던 친구 N은 육아로 2년간 일을 쉬게 되었고, 이제는 월에 200만 원만 벌어도 감사하다며 단념했다. 유명 패션 브랜드의 디자이너로 일하던 친구 C는 결혼 후 제주도로 떠나, 앞으로는 사업하는 남편을 내조하며 살겠다 말했다.
직위가 높아질수록 여성의 수가 적어지는 이유는 여러 가지이지만, 무엇보다도 리더가 되려는 야망이 작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남성 못지않게 직장에서 성공하려는 야망을 품은 여성도 많다. 하지만 사회를 깊숙이 들여다보면, 자료만 슬쩍 훑어봐도 여성보다 남성에게 고위직을 차지하려는 열망이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셰릴 샌드버그 <린 인>
"사람은 자신의 마음에 어울리는 일 밖에 만나지 못한다." 내가 옹졸해지거나, 소심해질 때마다 만트라처럼 외는 문장이다. 긴 인생은 아니지만, 삶을 되돌아보면 마음가짐의 차이가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 경우가 많았다. 먼저 큰 일을 마음에 품어야 큰 일을 할 수 있다. 아기를 낳고도 내 일을 포기하지 않겠다 호기롭게 마음을 먹었지만 자꾸만 의지가 약해진다. 매일 부족한 잠과 사투를 벌이다 보면, 정신이 몽롱하고 아득해진다. 육아와 일, 어느 하나도 제대로 못해내는 스스로를 채찍질 하고 자책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랭 드 보통이 말한 '사랑을 얻는 열쇠'(사회적 지위)를 포기하고 싶지 않다. 여전히 사랑받고 싶다. 사람이 태어난 이유는 사랑받기 위해서라고 믿는다. 스스로 가치 있다고 믿는 일, 내가 할 수 있는 일 중에 가장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
워킹맘은 누구나 '일을 그만둬야 하나?' 흔들리는 상황과 마주한다. 아이는 열이 펄펄 끓는데 돌봐줄 사람은 없을 때 막막하다. 돈은 맞벌이 인데, 맞가사는 되지 않을 때 억울하다. 아이의 성장에 문제가 생기면 다 내탓인 것 같아 죄책감이 든다. 마음을 다잡지만 답이 없는 막막한 상황이 무한반복된다. 돈이 필요해서, 그만 두기 아까워서, 그냥 일을 하고 싶어서 복직했지만 그보다 더 많은 힘든 일들이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을 막아선다. 먹고 사는 일만큼 중요한 일은 없지만, 먹고 살기만을 위해 일을 하다보면 고비가 반복될 때 '조금 덜 벌고, 덜 쓰자.'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될 확률이 높다.
엄마의 일이라고 해서 특별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내가 일하는 이유를 명확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러면 고비가 닥쳤을 때 '그만 둬야 하나?'가 아닌 '어떻게 해결할까?'를 고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일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 나에게 있어서 일의 의미를 단단히 잡고 있으면 흔들릴 지언정 무너지진 않을 것이다.
나에게 일은 삶이다. 의미있는 삶은 나다운 삶이라고 믿는다. 나다운 삶을 만드는데 있어서 가장 큰 요소는 일일 것이다. 하루 중 가장 긴 시간을 일하는데 쏟고, 그렇게 쌓인 시간들은 나라는 사람의 무늬를 만드니까. 일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관계 맺고, 세상에 설 자리를 만들어 나간다.
삶은 환경 때문에 견디기 힘들어 지는 게 아니라, 오직 의미와 목적이 결여 되어 있을 때 견디기 힘들어 진다. - 빅터프랭클 Viktor Frankl
나치 강제 수용소 중에서도 가장 잔인하다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에겐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고 한다. 그들에겐 고통을 버티게 할만큼 크고 중요한 '삶의 의미'가 있었다. 사랑하는 가족, 평생을 걸고 완성 시키고 싶은 연구, 맹목적인 삶에 대한 사랑등으로 이유는 다양했다. 일의 의미가 꼭 거창할 필요는 없다. 그저 나에게 중요하다면 족하다. 세상에 나 자신보다 소중하고 중요한 건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