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간 / 만달레이
파고다의 도시, 바간
해가 뜰 무렵, 수많은 벌룬이 수천 개의 불탑과 사원이 흩뿌려진 평원 위로 떠오르는 모습. 이 사진 한 장만으로도 바간은 꼭 가고 싶은 도시였다.
낭쉐에서 나이트 버스를 타고 바간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 4시.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바간 시내로 가는 택시 기사들이 벌떼처럼 몰려든다. 환상을 품은 도시에 도착한 것 치고는 좀 요란한 시작이었다. 흥정 끝에 택시를 하나 잡아타고 예약해둔 호텔로 향했다. 로비에는 아무도 없다. 우리가 인기척을 내자 자다 일어난 벨보이가 부스스 나온다. 잠이 덜 깬 눈으로 우리를 보더니 지금은 체크인이 불가능하니 가서 일출이나 좀 보고 오란다. 그래, 호텔 로비에서 멍하게 기다리는 것보단 그게 훨씬 나을 것 같았다. 전기오토바이를 한대 렌트해서 호텔 청년이 알려준 대로 길을 나섰다.
벨보이가 알려준 사원은 블레티 사원. 포장도로를 달리다가 길을 꺾으니 그때부턴 비포장 모래길이 시작되었다. 전기바이크를 처음 타보는 조서방이 결국 넘어지고야 말았다. 너무 웃기게도 나는 조서방 위로 넘어지는 바람에 하나도 다치지 않았다. 바지에 구멍이 나고, 턱을 다친 조서방. 바간 신고식 한번 호되다. 그렇게 어렵게 도착한 블레티 사원엔 이 동네 외국인 관광객은 다 몰려온듯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벌룬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알고 보니 우기에는 벌룬을 운행하지 않는 것. 역시 너무 기대를 하면 안 된다.
하지만 서서히 밝아오는 하늘, 하나둘 보이는 평원의 불탑과 사원들이 그런 아쉬움을 가시게 했다. 꽤 많은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블레티 사원은 조용했다. 말하지 않아도 모두들 바간 일출이 주는 경건함을 똑같이 느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바간의 꼬마들
바간에 머무는 동안 우리가 의식처럼 행한 일은 일몰을 챙겨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바간에 도착하기 얼마 전 제법 큰 규모의 지진이 바간을 강타했고, 많은 파고다들이 수리 중에 있었다. 오래된 유적지가 무너진 모습에 마음이 아렸지만, 열심히 복원 중인 모습에 안심이 되었다.
문제는 우리 같은 관광객들. 불안정하다고 판단되는 불탑이나 파고다 위에는 오를 수가 없었다. 대부분이 평지인 바간에서 불탑이나 파고다에 오르지 않고는, 바간의 풍경을 즐길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동네 꼬마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이 파고다는 안전해, 나를 따라와 봐'하는 녀석들 덕분에 이름 모를 사원에 올라 일몰을 즐길 수가 있었다. 귀여운 녀석들, 고마워.
외국인 노동자
저녁을 먹기 위해 트립어드바이저를 검색했다. 바간 올드타운 식당 1등은 작은 버거 가게였다. 음, 수제버거가 미얀마 맥주랑 아주 어울리겠다 싶었다. 소박한 올드타운에는 조금 어울리지 않지만 외국인 관광객들이 가득한, 분위기 좋은 버거집이었다. 메뉴판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는데, 사장님으로 보이는 청년이 말을 건다.
'한국인이세요?'
론지를 입은 청년의 한국말이 너무나 유창하다. 그렇다고 했더니 너무 반가워하며 자기도 한국에서 오래 일했었단다. 열심히 일했고, 돈을 모아 고향인 바간으로 돌아와 차린 게 바로 이 버거집이라고 했다. 왠지 마음이 찡했다. 타국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산다는 건, 누구에게든 힘든 일이었을 텐데. 이렇게 근사한 버거집을 차린 청년이 너무 대견했다. 그리고 한국인을 반가워할 만큼 좋은 회사에 다녔다는 것도 새삼 감사했다. 청년은 활짝 웃으며 삼겹살에 소주가 그립다고 했다. 수중에 소주가 있었다면 다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날 버거에 맥주는 유난히 더 맛있었고, 한국말이 유창한 사장님은 간간히 우리 테이블에 놀러 와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괜히 내 마음이 따뜻한 밤이었다.
바간 Extra Episode
만달레이로 가는 길
버스가 달린다. 문을 열어 놓은 채로...
사람들은 평온하다. 이방인 둘만 불안할 뿐. 시간이 지날수록 나도 적응했는지, 문밖 풍경을 응시하게 된다. 시원하니 좋구먼.
마하무니 파고다, 금으로 자라는 불상
만달레이에서 봤던 불상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마하무니 파고다의 불상. 미얀마 사람들의 금 보시 문화의 정수를 볼 수가 있었다. 아침마다 세안을 시켜드린다는 마하무니 파고다의 부처님 얼굴은 과연 반짝였다. 짜익띠요와 마찬가지로 여자는 불상 가까이 갈 수가 없어서 좀 아쉬웠지만 조서방이 다녀오는 것으로 만족했다.
사원 안에는 불상의 변천사를 보여주는 사진이 전시되어있었다. 1901년, 1935년, 1984년, 2010년까지 불상이 금으로 두꺼워지는 과정이 한눈에 보였다. 미얀마의 사원들에서는 서민들도 봉양을 할 수 있게끔 작고 얇은 금박을 파는데, 얼마나 얇으냐면 불상에 붙이기 전에 손가락에 먼저 붙어 버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게 얇은 금박들이 오랜 세월 모여 저렇게 거대한 불상이 되었다는 거니까. 정말 티클 모아 태산이 여기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뭘 그렇게 염원했을까. 금박이 모여 12톤의 불상이 될 만큼...
집으로
미얀마에서는 유난히 한국 버스를 많이 마주쳤다. 의미를 모르는 한글이 그림처럼 보였는지, 없애지 않고 그대로 둔 게 참 재미있었다. 한국 버스는 다양했다. 영어를 배우러 갈 수도 있었고, 부산으로 갈 수도 있었다. 이 버스 타면 집에 가나요?!
우베인 다리
만달레이의 우베인 다리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다리. 특별한 기교 없이 나무를 툭툭 박아 만든 소박한 다리는 그래서 더 멋스럽다. 우베인 다리는 일몰에 장관이 연출된다. 호수에 비친 빨간 하늘, 다리 그리고 사람들. 그런데, 우리가 간 날은 매우 흐렸다. 나름 날씨 요정인 나도 2년 내내 여행하는 동안은 어떻게 맞출 수가 없었다. 안타까웠지만 시원한 호수 바람을 맞으며 다리 위를 걷는 기분도 나쁘지 않았다. 그날 내가 우베인 다리에서 본 것들은 조각조각의 이미지로 생각이 난다.
보트로 수백 마리의 오리를 몰던 사공, 여러 가지 튀김을 소쿠리에 이고 사람들에게 팔러 다니던 소녀. 그리고 호수 가운데 작은 섬에서는 화보 촬영이 진행 중이었다. 규모로 보아선 미얀마의 영화배우쯤 되지 않을까 싶었다. 남녀가 전통의상을 입고 스태프들이 잔뜩 서 있는 모습은 꽤 진지 했으나, 다리 위의 내가 보기엔 아주 아득해 보였다. 보트를 탄 외국인 남자 두 명도 눈에 들어왔다. 사쿠라바 티셔츠를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라오스 방비엥 사쿠라바에서 조서방처럼 샷 좀 들이켰나 보다. 일몰을 기다리는 것 같았는데, 잔뜩 흐린 하늘은 당최 일몰을 보여줄 것 같지가 않았다. 두 사람의 얼굴에 '망했다'라는 표정이 떠오르는 게 보여서 피식 웃음이 났다. 미얀마 여행은 2017년 여름, 몇 년이 지난 일인데, 이렇게 단편적인 기억의 조각이 더 뚜렷하다. 사람의 기억이란 참 희한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