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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 기적은 이미 시작되었다

낮아짐으로 우리 곁에 오신 이야기

by AI혁신연구소 김혜경

성탄이 가까워질수록 세상은 유난히 분주해진다. 거리의 불빛은 더 밝아지고, 약속은 많아지며, 우리는 무엇인가를 준비하느라 바빠진다. 그러나 이 계절이 깊어질수록 마음은 오히려 더 무거워진다. 기뻐해야 할 이유는 충분한데, 정작 기쁨은 쉽게 머물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는 성탄을 너무 익숙한 이야기로 만들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성탄은 흔히 기적의 날로 기억된다. 하지만 성경이 전하는 성탄의 장면은 놀라울 만큼 조용하다. 왕궁도 없고, 환호도 없다. 말구유와 가난한 부모, 그리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밤이 있을 뿐이다. 성탄의 기적은 하늘에서 갑자기 무언가가 떨어진 사건이 아니라, 신이 스스로 낮아지는 방식을 선택한 순간에서 시작된다.


사도 바울은 이 사건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여기서 말하는 자기 비움, 곧 케노시스는 성탄의 핵심이다. 성탄은 전능함을 증명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전능함을 내려놓는 선택의 이야기이다. 기적은 힘의 과시가 아니라, 비움에서 시작된다.


이 낮아짐의 의미를 가장 깊이 사유한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은 디트리히 본회퍼이다. 그는 나치 정권에 저항하다 옥중에서 생을 마감한 20세기 독일 신학자로, 신앙을 관념이 아닌 삶의 자리에서 끝까지 붙들었던 인물이다. 본회퍼는 하나님을 인간의 고통을 멀리서 설명하는 분이 아니라, 그 고통 속으로 직접 들어오신 분으로 이해했다. 그의 사유에 따르면 성탄은 하나님이 인간의 삶을 이해하려 한 사건이 아니라, 그 삶을 직접 살아내기 시작한 사건이다.


이 선택은 사랑의 논리로도 설명된다. C.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를 통해 신앙을 지성적으로 풀어낸 영국의 기독교 사상가이자 문학가이다. 그는 사랑이란 언제나 위험을 동반한다고 말했다. 진정으로 사랑하려면 상처받을 가능성을 감수해야 하고, 상대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성탄은 신이 인간을 사랑하기로 결단한 가장 급진적인 방식이다. 신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인간이 되었고, 그 선택은 철저히 취약한 형태를 띤다.


이 취약함의 가치는 신학을 넘어 현대 인문학에서도 반복해서 강조된다. 사회심리학자 브레네 브라운은 수치심과 인간 관계를 연구한 학자로, 『취약성의 힘』에서 진정한 연결은 완벽함이 아니라 드러낼 수 있는 용기에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성탄의 아기 예수는 신이 선택한 가장 취약한 소통 방식이다. 요구하지 않고, 설명하지 않으며, 그저 함께 머무는 방식이다.


성탄의 의미를 이렇게 생각하다가, 나는 종강하자마자 짐을 챙겨 내려왔다. 홀로 사시며 요양사와 돌보미의 도움을 받아 지내시는 아흔셋의 어머니를 잠시라도 뵙기 위해서였다. 특별한 일을 한 것은 아니었다. 함께 앉아 식사를 하고, 안부를 묻고, 같은 공간에 잠시 머무는 것뿐이었다.


그 짧은 시간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마음으로는 늘 걱정하고 있었지만, 그 많은 마음씀보다 한 번의 실천이 훨씬 분명하게 관계를 남긴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성탄은 그렇게 거창한 결심이 아니라,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선택에서 시작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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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실대경영대학원 겸임교수 경희대학교 관광대학원 겸임교수 AI혁신연구소대표 생성형AI활용 브랜딩컨설팅(패션,뷰티,푸드,팻,서비스) 기술을 연구하며, 삶을 성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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