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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늬본 Apr 26. 2023

나의 아빠 케일럼에게

영화 <애프터썬>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매일 아침, 침대 옆에 깔아 둔 튀르키예산 카페트를 밟으며 아빠를 생각하면서 시작해.

그 이후로 하루라도 아빠를 생각하지 않고 지나간 날이 있을까.



아빠는 다시 그 카페트 가게로 돌아가

내가 여행이 끝나고 스코틀랜드로 돌아갔을 때 배송받을 수 있도록 부탁했겠지.

아빠가 남은 돈을 털어 준비한 마지막 선물이었을 거야.



아빠가 그렇게 떠난 지도 20년 정도가 흘렀지.

망각과 왜곡으로 기억은 점점 흐려져 가는데,

나는 캠코더로 남겨진 기록과 기억 사이의 빈틈을 상상으로나마 메꿔가면서

내가 그때 튀르키예에서 미처 보지 못했던 이면을 복기해.



아빠는 그 마지막 여행 동안 어떤 마음이었을까.

어떤 압박을 견디고 있었던 걸까. 

언뜻 불안을 애써 감추면서도 세상을 버거워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긴 했는데, 

무지했던 나는, 아빠가 무너지기 직전인 것까진 몰랐지.

내가 어떻게 했다면 막을 수 있었을까.

내 사랑이 너무 작아서 아빠한테 닿지는 않았던 걸까.

아빠를 구원하기는 부족했던 걸까.

나와 같이 노래를 불러주지 않는 아빠 때문에 뾰로통해져 

어떻게든 숨기려고 애쓰던 사실을 무기 삼아 내뱉었을 때, 

아빠는 벼랑 끝으로 몰아세워진 느낌이었을까.

답을 알 수 없는 질문들의 도미노 끝에

마지막이 될 줄 알았다면 그 말은 하지 말걸, 하고 자책하기도 해.



퀸이 under pressure 가사에서 “이건 우리의 마지막 춤이야.”라고 했지만,

사실, 춤인지 몸부림인지 모를 이 춤은 마지막이 아니야.

회상 속에서 영원히 계속될 춤이야.

일상 사이로 시도 때도 없이 불쑥불쑥 침윤해 끼어드는 플래시백 속에서 

아빠와 나를 겹쳐 보다가

어떨 땐 아빠를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가도,

이내 그렇게 떠나간 아빠가 미워져서 밀쳐내.

그렇게 떠나갈 수밖에 없었던 아빠가 안쓰러워서 또.

이랬다 저랬다 사랑하다 절규하고, 절규하다 사랑하고,

나는 아마도 반복되는 이 변덕의 춤을 평생 동안 계속, 혼자서 추겠지.

어둠 속으로 홀연히 걸어 들어간 아빠를 앞에 세워두고.



그 카페트 가게 사장님이 카페트 무늬에 따라 의미가 다르다고 했었지. 

찾아보니 카페트 안에 반복되는 전갈 문양은 

부정적인 에너지와 흑마법으로부터의 ‘보호(protection)’를 상징한다고 하네.


내 연약한 피부를 보호하기 위해 시간 맞춰 발라주던 자외선 차단제,

혹시나 위험에 닥쳤을 때를 대비해 몸을 보호하라고 알려준 호신술,

마음의 평정을 지키는데 도움이 될 태극권…



여행 내내 부드럽게 머리를 쓸어 넘겨주면서 다정하고도 단호하게

그 모든 행동들로 아빠는 나에게 계속 숨겨진 메시지를 심어 두고 있었어.


“나는 견디지 못해 떠나가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안 좋은 것들로부터 

너만은 어둠에 잠식당하지 않게 해주고 싶어.”

“내가 이 세상에 없어도 너를 지킬 수 있으면 좋겠어.”

“내가 떠난 뒤에도 네가 안전하고 안녕하길 바라.”


차마 아빠 입으로 내게 하지 못했던 그 말,

이제야 내가 잠금 해제해.



어렸던 내가 겨우 버텨내던 아빠를 구원하지는 못했지만, 

아빠가 남겨준 사랑 덕분에 나는 그것으로 버텨.


아빠도 젊은 나이에 아빠가 돼서 버거웠을 텐데,

아빠가 어린 시절 받지 못했던 사랑을 나에게만큼은 주고 싶어서


“너는 무엇이든 될 수 있어.”

“소피, 아빠한텐 무엇이든 말해도 돼. 네가 나이가 들면, 어떤 파티에 가던지, 누구를 만나던지, 심지어 마약을 한다던가 해도. 아빠한텐 무엇이든 말해도 된다는 걸 알았으면 해.”

어쩌면 스스로가 가장 듣고 싶었을 말을 내게 해주고,

아빠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던 걸 이제는 조금 알 것도 같아.


영어로 쉽게 번역되지 않는 튀르키예어 ‘hasret’은

그리움, 사랑, 상실이라는 뜻이 조합된 단어래.

잃어버려서 그리워하는 것까지 다 불가분의 사랑이야.


이렇게나마 나는, 아빠가 지고 나서 그을린 자국에 애프터썬을 발라.



-이제 아빠와 같은 나이가 된 딸, 소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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