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음과 동시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는 요즘, 나는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한 '예기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그래서 결국 바틀비적 삶을 살고 있다. 현실적으로 당연히 선택했어야 할 일에 대해 '안 하기로' 결정하고, 여전히 느즈막히 일어나 새벽에 잠을 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
내가 하고 싶은 게 뭔지 아직 잘 모르겠어서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중년의 우울증이란 것인지, 중년의 우울증이란 그래도 뭔가 이뤄놓은 사람들이 번아웃이 와서 그렇게 되지 않나? 나는 쥐뿔 가진 것 하나 없이 초고령화와 저출산에 기여를 해온 삶일 뿐인데 뭐가 그렇게 힘들어서 그런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엉덩이가 무거워져서 이젠 시내에 가는 일도 요원하고 몇 안 되는 인간관계도 스스로 끊고 고립된 삶을 살고 있어 어차피 나갈 일도 없다. 그래도 아주 가끔 나가고 싶을 때가 있는데 날씨가 더운 날엔 인천 공항이 딱이다. 물론 백화점이니, 멀티플렉스를 찾아 나설 수도 있지만 그런 곳은 사람이 너무 많고 시끄럽다.
평일 낮의 인천 공항엔 사람이 적당해서 익명성에 숨을 수도 있으며 아무도 나를 신경쓰지 않는다. 그저 분주하게 어디론가 떠날 사람과 여행의 흥분을 안고 돌아온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 속에 섞여 있으면 나도 어디론가 떠날 수 있을 것 같다. 공항이 주는 묘한 흥분감과 설렘은 아마 그런 기분 탓일 게다.
스페인 갈 때도 1여객터미널을 이용했기 때문에 2여객터미널에 처음 와봤다. 1터미널에 비해 많이 넓진 않아도 있을 건 다 있다. 지하1층에서 5층까지 몇 번을 돌아다녔는지 모른다. 5층엔 전망대가 있다.
인천 공항에 전망대가 몇 군데 있는데 2여객터미널엔 5층에 있다. 비행기 타고 떠날 생각에 바쁘게 쫓기다 보면 이런 전망대를 찾아오는 이들은 대부분 노인들이다.
어렴풋이 공항에 노인들이 진을 치고 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당연한 이치다. 이걸 나쁘게 볼 수가 있을까? 날씨가 더우니 당연히 실내에 머물러야 하고, 적당히 사람들이 있고 구경거리가 있는 곳, 젊은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 어디 동네에 많겠는가. 노인들이 카페에 있으면 젊은 사람들은 들어오지 않는다는 얘기는 쓸쓸한 현실이다. 초고령화로 접어들어 이젠 나이들 일만 남은 이 사회가 노인을 배척하기 보다 그들에게 어떤 환경을 조성해 줄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전망대 맞은 편에는 홍보관이 있다. 한눈에 인천공항의 부지와 미니어처를 볼 수 있다. 홍보관에는 아이들을 데려와서 설명해 줘도 좋을 것 같다. 잘 되어 있더라.
위탁수화물이 어떤 절차를 걸쳐 비행기에 도달하는 지 터치 스크린을 통해 볼 수 있다. 자세한 설명은 터치해서 볼 수도 있다. 홍보관을 먼저 들러 보고 전망대에 앉아서 비행기를 보면 어떤 방식으로 운행되는지 잘 알 수 있다.
전망대에는 카페도 있지만 거의 이용하는 사람은 없다. 나도 노인들 사이에 앉아서 비행기 구경을 한참했다. 너무 고요해서 시간이 다르게 흘러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모두 같은 방향으로 앉아 계류장에 있는 비행기와 오가는 차들, 사람들만 구경한다.
5층 전망대에서 본 차는 장난감 같고 사람은 레고 인형같다. 모두 정확한 구획에서 맡은 역할을 해내는 게 인형 놀이처럼 느껴졌다. 그런 인형 놀이를 바라보는 나는 전지전능한 신의 역할이 아니라, 한쪽 구석에 밀려난 잉여 인간처럼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전망대에선 활주로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양옆으로 오고가는 비행기가 살짝 보였다. 계류장에선 모두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속도로 움직인다. 성격이 급한 내가 보기엔 비행기 속도가 이렇게 느리니 활주로에 도착해도 내릴 때까지 한참 걸렸겠구나 싶더라.
멀리서 오던 델타 항공기는 노란선에 딱 맞춰 가지런히 와서 마음이 편안해졌다. 파일럿을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이 사진은 지금 내 핸드폰 바탕화면으로 설정해 뒀다.
델타 항공기가 멈춰 서고 브릿지이 연결되고 사람들이 나가는 것과 위탁수화물이 내려지는 것까지 구경했다. 내 자리에서 파일럿이 타고 있는 창문이 잘 보여서 반팔 유니폼을 입고 이것저것 만지며 내릴 준비하는 게 보였다. 손을 흔들면 저기서 보일까 싶었지만 흔들진 않았다.
위탁수화물을 내리는 걸 보니 비행기에서 일찍 내릴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차가 다 싣고 가기엔 모자랐는지 바닥에 캐리어 몇 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차가 곧 와서 싣고 가겠지 했는데 웬걸 한참을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 족히 10분 이상은 지나서야 차가 와서 싣고 갔다. 저 캐리어 주인들은 아무리 일찍 비행기에서 나왔어도 제일 늦게 캐리어를 받아가겠구나. 수화물 벨트에 왜 짐이 늦게 나오는 지 알겠다.
델타 항공기의 짐이 내려지고 점검 하는 걸 보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떠날 때까지 노인들은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사실 뒤돌아 나오면서 소름이 끼쳤는데 나이가 들면서 시간이 너무 쏜살같이 흘러간다는 느낌은, 결국 인생 전체에 해당되는 것일 뿐, 하루하루는 얼마나 느리게 늘어지는 것인지 깨달아서였다.
그렇다고 노인들의 현재 삶에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켜켜이 쌓아온 삶이 어땠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며 그 삶의 온전한 주인공은 바로 자신일 테니 삶의 의미도 저마다 모두 다를 것이다. 어떤 마음으로 앉아 있는지 짐작하는 것도 내 시각일 뿐. 인생이 너무 쏜살같고, 하루가 너무 늘어진다고 느끼는 것 또한 나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