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스를 대하는 나의 자세
'아- 온다 온다 온다 온다 온다... 망했다.'
갑자기 억누르기 힘든 내 감정에 가려 눈 앞이 하얘지거나 어느 순간 모든 것으로부터 멀어져 문을 탁 닫고 싶은 기분이 나를 찾아올 때, 그분이 오신 거다. 아무도 없을 때 찾아오시면 시간 내어 살펴드리고 잘 달래서 보내드릴 텐데, 이 분은 하필 내가 시간이 정말 없을 때,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고, 모든 사람들이 나를 필요로 하는 것 같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을 해내야만 할 때, 아니면 모처럼 혼자 항상 나를 따라다니던 생각들에 바삐 골몰할 때만 귀신같이 골라서 어김없이 찾아오신다. 그분은 오시는 그 순간부터 가실 때까지 어마어마한 존재감으로 내 집중력을 흐트러뜨리고 내 의지를 집어삼킨다.
언제부턴가 내 처지는 생각도 않고 불쑥불쑥 찾아와 내 관심을 끝없이 갈구하는 그분이 너무 야속하기만 했다. 그래서 그분이 오시면, 일단 못 알아보는 척, 안 보이는 척, 관심 없는 척 더 바쁘게 움직였다. 그렇게 하면 어떤 날은 그분이 오신 것 같기는 한데 안 보일 때도 있었고, 오셔서는 조용히 나를 기다릴 때도 있었다. 일단 그렇게 모른 척을 하다가, 더 이상 모른 척하다가는 그분이 폭발해서 큰 소리를 지를 것 같은 순간이 올 때가 더러 있기도 했다. 그럴 때에는 주변 사람들에게 그분의 존재를 알리기 싫은 마음에 그분을 데리고 어디든 나가서 대충 뭐라도 했다.
'예예, 저 여기 있어요. 오신 줄 몰랐죠- 언제부터 와 계셨어요?'
한껏 너스레를 떨며 닥치는 대로 할 수 있는 걸 했다. 술을 마시며 얼큰하게 취한 상태로 같이 곯아떨어지기도 하고, 시장하신 것 같으면 맵. 단. 짠의 조화가 심하게 한 데 어우러진 떡볶이나 한 밤에 아이스크림, 초콜릿 케이크 같은 것을 입에 넣어드리기도 했다. 그렇게 하면 그다음엔 여전히 불쑥불쑥 찾아오시긴 해도 얌전히 나를 기다렸다.
어느 날은 모처럼 쉬는 날이었다. 몸도 마음도 축축 늘어져 아무것도 하기 싫은 그런 여느 휴일. 그렇게 늦잠을 자고 일어나 문득 전신 거울을 봤는데, 거울 속 내 모습이 있어야 할 자리에 푸석푸석한 얼굴에 불만과 슬픔이 가득한 채로 나를 노려보는 한 사람이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 그분인가-.... 또 언제 온 거야.'
모처럼 쉬는 날이라 축 처져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는데- 여기까지 찾아온 그분이 퍽 귀찮았다. 그런데 그분 표정이 심상치가 않았다. 아는 척을 할까 말까 잠깐 망설이다, 늘 그랬듯 당연하게 우선은 안 보이는 척하려던 참이었다.
"이제 니 얼굴도 못 알아보는구나. 저게 바로 지금 너야. 그거 알려주려고 계속해서 너를 찾아왔던 건데."
그분 목소리가 내 안에서부터 쩌렁쩌렁 들려왔다.
그제야, 언제부턴가 왜 주변 사람들이 나를 보면 슬금슬금 피해 다녔는지 알 것도 같았다. 내가 그분을 늘 피해 다니고 싶어 했던 것처럼, 나도 혹시 다른 사람들에게 그분 같은 존재였던 것은 아닐까. 이 귀신같은 몰골과 약해질 대로 약해진 멘탈로.
내가 나를 돌보지 않아 몸도 마음도 망가져가고 있던 그때마다 사태의 심각성을 일깨워주려 매번 먼 걸음 마다하지 않고 찾아오셨다는 그분이 새삼 고맙게 느껴졌다. 이렇게 고마운 분께 그동안 그렇게 외면하고 박대를 하다니, 너무 죄송했다. 오늘은 그분이 가시기 전에 시간을 꼭 따로 내어 장을 보고 제대로 한 끼 차려 드려야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오랜만에 실력 발휘 좀 해볼까.
샤워를 하고, 근처 마트에서 장을 보고, 더듬더듬 예전 기억을 되살려 왕년에 내가 제일 자신 있게 만들었던 새우 토마토 파스타를 만들기 시작한다. 마늘과 양파를 다지고 새우를 다듬고 적당한 때에 재료를 차례로 넣고 달달 볶다가 토마토소스 투하. 면이 너무 무르지 않게 그렇다고 너무 딱딱하지 않게, 그렇게 적당히 잘 삶으려면 냄비를 잘 주시하고 있어야 하는 작은 노력도 빠뜨릴 수 없다. 만드는 요리에 집중을 하면 할수록, 회사 이메일 계정에 남아있는 끝내지 못한 일들도, 직장 동료들의 채근도, 부모님의 기대도 야금야금 머릿속에서 사라져 간다. 이 순간만큼은 오롯이 양파를 균일하게 다지려 바삐 움직이는 내 손, 내 손 끝의 감, 그리고 냄비를 주시하고 있는 내 눈이 바로 주인공이다.
그렇게 혼을 쏙 담아 정성껏 파스타를 만들고 나니, 나도 그분도 한 껏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식사에 임한다.
“요리를 잘하네.”
"많이 드세요. 재료가 신선해서 맛있나 봐요. 역시- 저는 고기보다는 채소랑 생선이 좋더라고요."
맞다- 나는 채소랑 생선, 해산물류를 좋아했구나. 맨날 시간 날 때 아무거나 되는대로 쑤셔 넣다 보니 내가 뭘 좋아하는지도 잊어버리고 살았다.
"요리는 언제 배운 거야?"
“예전에 시간 있을 때 하나둘씩 그냥 해봤던 거예요.”
“지금은 왜 요리를 안 해?”
“낼 시간이 어디 있나요- 일하느라 이렇게 바쁜데...”
“그럼 지금은 한가해서 이렇게 한 상 차려먹는 거야?”
“그건 아니지만-“
“것 봐. 넌 그냥 마음이 없는 거다. 너 스스로에게 좋은 요리를 해주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거라고.”
아, 창피하다. 그분에게도. 나 스스로에게도.
“쓸데없는 걱정에 시간 낭비하지 말고 그 시간에 너를 위한 것들을 좀 하면 좋겠다. 공부도 좋고, 일도 좋고, 성공도 좋지만 우선 무너지지 말아야지. 그 얘기를 해주려고 계속 찾아왔던 거였어.”
드디어 자기 할 말을 제대로 했으니 이제 가겠다신다. 그분은 오실 때 홀연히 오시 듯, 가실 때도 순식간에 사라진다.
나는 그분의 오시는 소리, 또는 내 마음속에서 울렸던 그 목소리에 예전보다 예민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그분이 오신 그 순간조차도 모른 척하기 바빴던 예전과 달리, 지금은 그분이 잔소리를 하러 오실 것만 같은 타이밍이다! 싶으면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우선 심호흡. 그리고 조만간 무슨 음식을 해 먹을까나 하는 그런 기분 좋은 생각을 한다. 나를 기분 좋게 하는 다른 것들은 뭐가 있나 고민도 하고, 사진 찍기라든가 스포츠 같은 것들을 몇 번 시도해보기도 했는데, 우선 현재까지는 내가 만든 음식이 맛있을 때, 그리고 그 맛있는 음식을 내가 먹을 때, 나는 제일 만족감을 느낀다.
내가 나를 제대로 알아가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리고 그 과정에 점점 빠져갈수록, 그분이 나를 찾아오는 횟수도 눈에 띄게 줄었다. 오신다 해도 아주 잠깐 앉았다가 가실 때가 더 많은 것 같다. 가끔 오래 계실 땐 내가 틈틈이 생각해두었던 이런저런 레시피로 요리 대접을 하는데, 맛이 있든 없든 흡족하게 한 끼 함께 하신 후 다음엔 이렇게 해봐라 저렇게 해봐라 훈수 몇 가지 두시다가 또 홀연히 사라지신다.
그분과의 짧은 이야기를 쓰는 이 기회를 빌려 그분께 못다한 한마디 남기고 싶다.
"스트레스 선생님, 항상 한 걸음에 달려와 저보다도 더 저를 챙겨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앞으로는 전처럼 너무 자주 찾아오시지 않게 제가 저를 잘 챙기도록 할게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