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처에서 사람 하나 죽어 나가도 모르지 않을까 생각된다.
[타닥타닥]
[타다다닥]
주변을 둘러보니 모두 모니터만 바라보며 타이핑을 하고 있었다. 최근 복지 차원에서 테스트 그룹의 모든 사무직 모니터를 24인치로 올려줬다. 기존의 17인치 모니터에 24인치 모니터를 한 대씩 더 줬다. 모두 듀얼 모니터를 사용하게 되었다. 24인치 모니터가 설치된 날에는 기존의 17인치 모니터가 작고 못생겨 보였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상 직원을 위한 복지를 가장한 회사를 위한 복지다. 우리는 24인치의 넓은 공간에 더 많은 소스 코드와 업무 문서를 띄웠다. 귀퉁이에는 메신저를 켜두고 실시간 메일을 확인하기 위한 아웃룩을 배치했다. 24인치의 모니터는 어느새 업무 관련 프로그램으로 가득 찼다. 24인치 모니터의 또 다른 역할은 서로의 얼굴을 안 보이게 가려줬다. 각자 모니터 밑에 전공 서적을 두고 모니터를 높이 올렸다. 그렇게 각자의 몸과 얼굴을 가렸다. 사무실 책상에 칸막이가 있지만, 그 칸막이는 어깨높이밖에 오지 않았기 때문에 거대한 모니터가 칸막이가 되었다. 생산부에서는 이런 칸막이조차 없었다. 서로의 몸과 민낯이 그대로 노출된다. 뭐 그게 자연스러운 환경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긴 했다. 그래도 그때가 정겨운 점은 있었다. 서로의 몸과 얼굴이 노출되어 가끔 눈을 마주치면 눈인사를 했다. 물론, 뭘 째려보냐는 식으로 인상을 쓰는 사람이 더 많았다. 지금은 철저하게 단절되었다. 제조팀 또는 품질팀의 누군가 내게 와서 뭐라고 하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귀로 들을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을 들으며 타이핑 중일 것이다. 서로의 얼굴도 안 보이기에 서로 어떤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다.
[타닥 타닥]
[타다닥]
[딸깍 딸깍]
여전히 키보드 소리만 요란하게 들릴 뿐이다. 조금 과장하면 여기서는 근처에서 사람 하나 죽어 나가도 모르지 않을까 생각된다.
“철수야, 그룹장님이 부른다.”
김윤태 과장이 말했다.
“네? 갑자기요?”
난 놀라서 물었다. 그룹장급이 사원을 부르는 일은 거의 없다.
“놀라지 말아. 그냥 면담이야. 다들 돌아가면서 하고 있어. 마음 편하게 다녀와.”
김윤태 과장은 살살 달래주며 말했다. 갑자기 그룹장님과 면담을 하게 되었다. 정동환 그룹장. 조직개편 이후로는 얼굴 보기가 매우 힘들다. 거의 팀장들과만 소통하는 걸로 알려져 있다.
“안녕하세요. 그룹장님.”
“어. 고철수 사원 테스트 4팀에서 잘 지내지? 여기 앉아."
정동환 그룹장의 얼굴은 그룹장의 얼굴이 되어있었다. 근엄한 표정으로 전 그룹장의 자리에 앉아있었다. 가끔 골프 스윙 연습을 하는지 한구석에는 헤드가 없는 골프채가 세워져 있다. 그의 뒤에는 큰 책장이 있고, 벽돌 같은 책들이 책장 안에 있지만, 전혀 읽지 않는지 먼지가 쌓여있다. 정동환 그룹장의 표정은 더없이 엄격하고 근엄하며 여유로워 보였다. 그 표정은 라이벌 태부장을 물리친 승리자의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아니다. 여유로워 보이려고 애쓰는 표정이다. 근엄하며 여유로운 표정을 만들고 있었다. 사실상 예전부터 그런 표정의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자, 여기 소파에 마주 앉아서 얘기합시다.”
“네….”
그 앞에는 좌우로 3인 소파가 있다. 소파의 중앙 부분에 사람들이 많이 앉았는지 번들번들하고 쿠션감도 꺼져있는 모습이다. 눌려있는 소파가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해서 소파의 모서리에 자리 잡고 앉았다. 정 그룹장은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소파의 중앙에 앉았다.
“고철수 사원이 예전에는 생산부에서 왔다고 했었나?”
“네.”
“온 지 얼마나 되었지?”
“3년 넘었습니다.”
“입사 연차는?”
“7년 차 되었습니다.”
“7년 차 사원이지만 3년 차 사원과 다름없다는 얘기네. 철수 씨가 여기 와서 일해보고 알겠지만, 생산부의 업무는 여기서 별로 쓸데가 없거든. 생산부에서 뭘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하지 않았다.
“철수 사원의 지난 경력은 그냥 단절된 경력이라는 말이야. 가만 보자…. 나이가….”
“서른여섯 살입니다.”
“석박사인가?”
“아니요. 학사 졸업이에요.”
“흠, 회사에 입사도 늦게 한 편이네. 여기서 뭐 다른 일 하고 싶은 것이 혹시 있나?”
아무래도 나를 너무 호구 취급해서 그의 말꼬리를 잡고 아무 말이라도 해야겠다 싶다.
“저는 사실 테스트 그룹 업무 파악이 끝나면, 생산부의 단절된 경력을 연결하려고 했거든요.”
“호오, 그게 뭐지?”
“최근에는 원자재 제조를 할 때 다양한 환경조건을 자료로 빼고 있거든요. 그 환경조건에 따라서 이곳 테스트 결과가 흔들릴 거라고 봅니다.”
“그…. 그래? 그래서 자네가 하고 싶은 일은…. 그런 업무를 하고 싶다?”
“네 결국 빅데이터를 수집해서 기계학습을 하고 딥러닝까지 하는 것이 목표예요. 최종 결과물로는 예측 분석 시스템을 만들고 싶어요."
시기상 조금 앞서간 얘기였지만, 그룹장 정도의 임원이면 알아먹겠다 싶어서 속마음을 얘기했다. 정동환 그룹장은 말문이 막힌 듯 한동안 창밖을 바라보았다. 소파 테이블 구석에는 스카치 캔디가 있었다. 어쩐지 그에게서 캔디의 향이 느껴졌다. 그는 소문난 골초이기에 담배의 향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또는 금연을 노력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스카치 캔디의 향으로 그의 겉 냄새는 속일 수 있겠지만 썩은 속을 바꿀 수는 없다고 본다.
“흠….”
그러다가 문득 할 말이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그런 얘기들은 어디서 주워 들었나?”
“주워들은 것은 아니고 제 생각이에요.”
“그런 것들 뭐 어디 지원금 받고 싶은 교수 나부랭이나 떠들고 다니는 것들 아닌가?”
정동환 그룹장은 역시 고리타분한 양반이었다. 뒤늦게 회사에서 지원하는 MBA 과정을 수료하여 석사학위를 받았다고 들었는데 아마도 그 과정을 밟고 논문을 작성하며 교수들에게 많이 당한 것 같다. 줄타기는 귀신같이 잘해서 이 자리까지 올라왔겠지만, 미래 사업에는 까막눈이다.
“저는 언젠가는 인공지능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봅니다.”
“영화를 너무 많이 봤어. 막 터미네이터가 길거리에 다니고 우리는 백투 더 퓨처 해야 하나?”
“그룹장님, 그게 아니고….”
“그 얘기는 이만 되었네. 요즘 뭐 어려운 일은 없고?”
지금 정 그룹장 당신과 대화하는 게 어렵다..
“새로운 분석 인프라를 구축하기 힘들지만 어쨌든 대응하고 있습니다.”
“그래, 자네는 쓸데없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거를 잘해야 해. 하던 일을 잘하라는 얘기야. 내년에는 진급해야지. 그래, 이만 면담 마치고 다음 차례 오라고 해줘.”
“네…. 그럼 일어나 보겠습니다.”
그룹장과의 면담은 그룹장으로서 그룹원들과의 정기 면담이었다. 작년 그룹장과 팀의 리더를 겸임하면서 바쁜 시간을 보낸 뒤 조직개편이 끝나고 분위기가 잠잠해져 이제야 그룹원들과 대화의 자리를 만든 것이다. 이 또한 보여주기식의 하나다.
“철수야 면담 잘했어? 우리 배용준 선배랑 둘이 매점 갈려고 했는데 같이 갈래?”
김윤태 과장이 말했다. 그의 옆에는 배용준 과장이 있었다. 최근 남자 육아휴직을 삼 개월 정도 사용하고 복직했다. 꼭 육아를 위해 시간을 보내고 온 게 아니고 소문으로는 가족이 아팠다고 들었다. 그는 이미 차장급이다. 남자 육아휴직을 장려하지만, 막상 사용하고 오니 진급이 누락되었다고 한다. 배용준 과장은 170 정도의 키에 바람머리를 휘날리며 큰 무테안경을 착용했다. 검붉은 피부에 뚜렷한 이목구비를 갖고 있다. 우리 셋은 매점으로 향했다. T1 공장의 매점은 구멍가게 같다. 비좁은 공간에 다양한 제품들이 구겨 넣어져 있다. 협소한 공간의 사내 매점이지만 술 빼고는 다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어딘가에서 오징어 냄새가 진동한다. 익숙한 냄새다. 숏다리의 냄새다.
“어? 형.”
“선배.”
곽정훈과 김팔봉 둘이 숏다리를 뜯고 있었다. 숏다리는 아마도 학창 시절부터 봐왔던 조미 건조 오징어 식품이다. 불량식품과 일반식품의 경계에 있다. 하지만 수십만 학생들이 먹고 전혀 탈이 없는 것을 보면 일반식품에 가까운 것 같다. 특이한 점은 숏다리라는 이름에 맞게 짧게 잘린 다리만 있다. 일반적인 오징어 가공 제품이 머리와 몸통 부분을 활용한다. 그것에 대한 역발상으로 남아도는 다리를 가공해서 상품화했다. 결과는 대성공이다. 우리가 배터리를 생산하고 테스트하며 발생하는 수많은 자료도 상품화가 가능할 텐데 그룹장에게 올린 제안이 철저하게 무시당했다고 생각하면 답답한 현실이다. 아무튼 숏다리는 오랜 기간 국민 간식으로 사랑받고 있다. 한 번도 안 먹은 사람은 있겠지만 한 번만 먹은 사람은 없는 간식이다. 쌉싸름하면서 달짝지근한 그 특유의 맛이 있다. 한번 씹으면 생각보다는 단단하지만 살살 혀를 돌려서 달고도 짭짜름한 양념을 빨아먹으면 숏다리는 약간 흐느적 해진다. 그때 어금니로 살짝 씹으면 베여있던 쌉싸름한 맛이 입안에 버무려져서 황홀경에 빠지게 된다. 조금 더 편하게 먹고 싶다면 전자레인지에 7~8초 정도 돌리면 처음부터 쉽게 씹어 먹을 수 있다. 가격은 단돈 천 원이다. 천 원의 행복이다.
“이 시간에 둘이 웬일이냐?”
내가 그들에게 물었다.
“팔봉이 또 변진섭 팀장에게 털렸단다.”
정훈이가 말했다.
“형도 하나 뜯을래?”
“아니야, 난 팀 선배들과 왔어. 다음에 같이 뜯자.”
“그래. 다음에 같이 술이나 한잔하자.”
정훈이가 말했다.
김윤태 과장과 배용준 과장은 한구석에서 신나게 간식을 고르고 있었다. 그들은 갈아 만든 배를 골랐다.
“이야. 이게 아직도 있네. 철수야 갈배 투 플러스 원인데 너도 이거 먹지 않을래?”
김윤태 과장이 말했다.
“네. 좋죠.”
우린 각자 갈배를 한 캔씩 들고 공장 앞 벤치에 앉았다.
“자네가 생산본부에서 여기까지 넘어온 친구인가? 나도 그쪽 출신이야. 예전에 K7 공장이라고 자네는 모를 거 같네.”
배용준 과장이 말했다.
“철수야, 첫날 나도 거기 출신이라고 말했지? 그때 너가 아는 김 선배랑 배 선배랑 K7에서 셋이 같이 일했어. 그땐 선배들이랑 우리 모두 사원이었지. 그게 언제냐.”
김윤태 과장이 말했다. 그들은 아련한 추억을 이야기하며 대화를 이어갔다. 그들이 그곳에서 일하던 시절은 내가 있던 특수조립팀이 생기기도 전이다. 그들은 생산부에서 일하다가 K7 공장이 문을 닫으면서 흩어졌다고 한다. 김윤태 과장과 배용준 과장은 그때 테스트 그룹으로 넘어와서 자리를 잡았고 김 선배는 K1 공장으로 이동했다. 나머지 동료들 모두 뿔뿔이 다른 공장, 다른 그룹으로 흩어졌다고 한다.
“처음엔 우리가 여기 와서 몇 가지 개선 제안을 내놓았는데 모두 무시당했어. 자네도 아마도 그럴 것이야.”
배용준 과장이 말했다.
“맞아. 철수야, 우리는 그저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지내는 게 좋은 거야. 여기서 우리가 뭐라고 해봐야 아무 소용없어. 이 바닥이 그래.”
김윤태 과장이 말했다. 그들은 조용히 살고 있었다. 그들도 물론 혈기 왕성했던 사원, 대리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런 혈기가 소용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테스트 그룹의 대부분 선배는 그 어떤 변화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겉으로는 번지르르한 과제를 만들며 혁신을 외치고 있지만, 내부는 염증이 생기고 고름이 들고 있었다.
“철수 사원 나 좀 잠깐 봅시다.”
사무실에 들어가서 자리에 앉자마자 조병진 팀장이 불렀다.
“네”
팀장을 따라 작은 회의실로 들어갔다. 3년 전 테스트 그룹에 처음 오게 될 때 면접을 봤던 그 회의실이다. 그때만 해도 이곳 테스트 그룹은 꿈의 그룹, 꿈의 팀이라고 생각을 했다.
“철수 사원 지금 근데 7년 차 아니에요? 왜 아직도 사원이죠?”
조병진 팀장이 다짜고짜 물었다.
“아, 그게 여기 테스트 그룹에 오기 직전에 저등급 받은 것도 있었고 테스트 1팀에서 잡무를 위주로 하다 보니 아직 진급 기회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인제 와서는 딱히 부끄러움이라든지 주저할 것이 없기에 사실대로 말했다.
“그건 핑계고.. 7년 차 사원이라…. 문제가 많네요. 학교는 좋은데 나왔던데…. 근데 왜 이 모양이에요? 뭐 하긴 나도 밀려 나와서 테스트 4팀까지 왔어요. 올해 아무튼 잘해봅시다.”
약간은 기분 나쁜 팀장과의 대화가 마무리되었다. 팀장은 바쁜 일이 있는지 시계를 보며 급하게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난 천천히 회의실을 정리하고 사무실 자리로 이동했다. 자리에 앉아서 메일과 메신저를 켜고 이전에 있던 테스트 1팀의 업무 흔적들을 정리했다.
“이봐요, 철수 씨.”
테스트 1팀의 에이스 현진영 대리가 얼굴을 붉히며 흥분한 상태로 내게 다가왔다.
“네 안녕하세요?”
“안녕 못해요. 일을 이따위로 해놓고 팀을 옮겨버리면 어떻게 해요?”
“네?”
난 당황해서 말이 안 나왔다. 현진영 대리는 평소에 평가받기 좋은 업무만 골라서 받으며 매년 고등급을 받는 에이스다. 그런 그가 내 업무를 받아서 하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그도 하던 업무가 있어서 그가 주로 받고 옆에서 강정혜 대리가 돕기로 했다. 강정혜는 대리 진급을 했음에도 아직 본인 밥벌이도 제대로 못 한다고 알고 있다. 결국 현진영 대리가 혼자 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 상황에 1차로 짜증이 난 것이고, 받은 업무의 상태를 보고 2차로 짜증이 난 게 뻔하다. 짜증 나는 일을 했던 내가 진작에 짜증을 내야 하는 게 맞겠지만 난 이미 그곳을 빠져나온 사람이고 남은 사람이 정말로 짜증 나 있는 상황이다.
“아니, 일을 이따위로 해놓으면 다음 사람이 어떻게 하냐고요. 철수 씨가 관리하던 소스 코드 열어보니 무슨 내용인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뭐를 관리한다고 버그를 엄청나게 심어 놓아서 디버깅하는 것만 한 달은 걸리겠네요. 게다가 TTR을 왜 그렇게 비효율적으로 해놨어요? 문구열 선배가 그렇게 가르쳤어요?”
듣다 보니 좀 심하다 싶긴 하지만 잘 생각해 보니 그의 짜증은 인간 고철수인 나에게 난 게 아니고 업무에 짜증이 난 거다. 난 한걸음 물러서서 나의 그 짜증 나는 업무를 받은 현진영 대리를 위로하기로 했다.
“현진영 대리님, 저도 그 일을 하면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어요. 문구열 선배라고 하는 사람은 알다시피 말만 많고 실제로 도와준 것은 거의 없어요. 지금은 신제품을 위해 파견을 간다고 자리를 비운 지 오래되었죠. 그렇게 소스 코드를 혼자 관리하다 보니 상황이 어려워졌어요. 어려운 상황에 마무리를 완전하게 못 한 것은 양해해 주세요. 저는 무늬만 7년 차 사원이에요. 능력 있는 현진영 대리님이 잘 매듭을 지어주실 것으로 믿고 나왔어요.”
“네? 아…. 아직도 사원이에요? 아무튼 저는 지금 매우 짜증 나서 여기 와서 이렇게 말했지만 정말 하기 싫네요. 변진섭 팀장이 하는 말이 나한테 이런 골치 썩는 일도 수습하라고 매년 고등급 주는 거라면서 저보고 알아서 하래요.”
“그렇게 일하기 싫으면 등급에 연연하기 싫다고 말하세요.”
“그거는 좀….”
“밖에서 커피나 한잔할래요?”
“네….”
자칫하면 말려들 뻔했던 대화를 내가 잡아당겨서 결국 이끌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 어색하게 밖으로 나갔다.
“제가 커피 사겠습니다. 철수 사원님….”
그는 갑자기 내게 깍듯하게 대했다. 우리는 커피를 들고 회사 앞 벤치에 앉았다.
“제가 그래도 여섯 달 먼저 들어왔을 뿐이고 두 살이나 어린데 아까 막말해서 죄송해요.”
그는 결국 내게 사과했다.
“아니에요. 그럴 수 있죠.”
제일 편한 대답이다. 그럴 수 있다는 말은 무적의 말이다. 어느덧 초연해진 내가 자주 쓰는 대답이다. 모든 상황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진심으로 대답하는 말이다.
“저는 사실 이제 삼십 대 초중반인데 벌써 머리가 벗어졌어요. 지금 제 머리는 사실 부분 가발이에요.”
“헉…. 그래요? 몰라보겠는데요.”
“이 가발 맞추는데 한 300 들었어요. 제가 사실 조금 멍청한데 그것을 극복하려고 무리해서 머리를 많이 써서 일찍 탈모가 와버린 것 같아요. 과부하가 걸렸나 봐요. 그냥 제 뇌피셜이에요.”
그럴 수 있겠지만 만약에 그렇다면 모든 과학자, 박사들이 대머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의 수면 습관, 음주, 흡연, 식습관 등 모든 생활방식이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는 주말부부이기에 평일이 자유롭다. 자유롭게 음주와 흡연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것만으로 충분히 감점 요소이다.
“철수 사원 잠깐 봅시다.”
조병진 팀장은 나를 자주 불렀다. 저 양반이 자꾸 왜 또 부를까 이상했다. 아마도 저 양반도 다른 팀에서 쫓겨나다시피 이 팀으로 오게 되어서 내가 제일 편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나 역시 쫓겨나다시피 이 팀으로 왔기 때문이다. 기존에 있던 이 팀의 팀원들은 모두 겉으로는 유해 보이지만 내면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외유내강의 팀원들이다. 특히 테스트 그룹에서만 근속 30년을 채운 이우현 부장은 그 어떤 팀장이나 그룹장보다도 높은 연배와 경험하고 있다. 이 팀의 실제 팀장은 이우현 부장이다. 그가 정신적인 지주 역할도 겸했다. 어떤 팀장이 이우현 부장의 위로 와도 그를 건드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병진 팀장이 막내 시절에 이우현 부장이 과장이었다는 얘기도 있다. 이 팀은 이우현 부장을 중심으로 알게 모르게 똘똘 뭉치는 팀이다. 조 팀장에겐 그저 내가 만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철수 사원 요즘 무슨 일 하죠?”
“저는 전에 3년간 하던 테스트 코딩 업무를 살려서 분석 프로그램을 코딩하고 있습니다. 테스트 그룹의 대표 장비로 DC장비, AC장비, 번인장비가 있는데요. 이 3개의 장비를 모두 운용하며 제품 분석의 기반을 마련하려고 합니다.”
“그래요. 그 생각은 좋은데요. 대체 목표가 뭐예요?"
“분석 기반을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숫자로 표현이 안 될까요? 그리고 납기도 정합시다.”
“3개 장비를 기반으로 하는 분석 기반 마련으로 분석 효율화 100% 달성 이렇게 할까요? 납기는 상반기 6월까지??”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떻게 해요? 그렇게 할 거예요? 할 수 있어요? 나는 여러분 말을 쉽게 믿지 못해요. 업무의 중간 진행 상황과 결과물에 대해서 정리하고 매일 나한테 보고하고 퇴근하세요.”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상대하다가 한 달, 두 달이 넘어가니 조병진 팀장을 죽이고 싶었다.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든 것은 7년 전에 생산부에서 나를 괴롭힌 사람들에게 가졌던 마음 이후로 오래간만이다. 조병진이 만만한 나를 찍었다는 것 때문에 화가 치밀어 올라서 그런 마음이 들었다. 조병진은 예전 파트장 시절부터 파트원 한 명을 찍어서 영혼까지 탈탈 털어버린 이후에 퇴사하게 만들어버리는 것으로 유명했다. 방법은 몇 가지 단순한 방법이 있었다. 그중에 한 가지는 목표와 납기를 만들게 만들어서 그것을 매일 확인하는 방법이다. 확인은 말보다는 자료로 한다. 그는 언제나 많은 양의 자료를 요구한다. 자료의 양으로 업무에 임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목표와 납기는 필수 사항이다. 이 양반은 계속 나를 괴롭힐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테스트 1팀에서 좌천되다시피 온 것과 그 양반이 좌천된 시기가 똑같았고 그는 더는 아쉬운 것이 없는 양반이다. 난 그저 이 양반이 나를 만만하게 보고 찍었다는 느낌을 받아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봐요, 철수 사원? 내 질문에 대해서 아직도 생각하고 있나요?”
“아…. 네, 그렇게 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래요. 해봅시다.”
조병진은 뭔가 급해 보였다. 그렇게 말하고 급하게 밖으로 나갔다. 그 바람에 내 화는 조금 사그라들었다. 그는 알 수 없는 무언가에 쫓기는 것 같았다. 그는 예감했을지도 모른다. 그의 자리도 오래 남지 않았음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갑자기 머리가 멍했다. 멍하면서도 띵했다. 손으로 이마를 만졌다. 두통이 밀려왔다. 내 육체는 멀쩡하지만, 신경과 마음에 문제가 생긴 기분이다. 아마도 테스트 그룹에서 쌓여온 지난 3년간의 정신적인 피로가 나도 모르게 신경과 마음을 힘들게 만들었음이 분명하다. 눈을 감고 이완하고자 했지만, 다시 반복되었다. 언젠가 정훈이가 지나가면서 말했던 회사의 정신건강 센터가 떠올랐다. 회사는 최근에 정신건강 센터를 만들었다. 이름이 ‘마음훈련’이다. 회사에서 만든 센터라서 의심되면서 믿음이 가지 않았지만, 호기심에 그곳을 찾아가 보기로 마음먹었다. 다행히 상담 센터는 사무실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 옆 건물에 보건센터가 있는데 그곳 2층 구석에 작게 자리 잡고 있었다.
[똑 똑]
“네, 잠시만요.”
안에서는 어떤 여성의 목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끼이이익]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을 열고 들어간 곳에는 공용 공간이 작게 구성되어 있었다. 한쪽에는 2인용 간이 소파가 있었고 반대쪽에는 간이 책장이 있었다. 책장에는 역시 마음 건강에 관한 다양한 책들이 있었다. 창가에는 화분과 조명이 있었다. 작은 공간이 알차게 구성되어 있어 빈틈이 없었다. 안쪽에는 두 개의 방이 있었다. 그중에 한 방의 문에 열려있었다. 그 안에 여성이 내게 다가왔다. 상담사다. 그녀는 청순한 외모에 선하고 순수해 보인다. 부드러운 아름다움이 돋보이며 편안함을 전해주는 이목구비에 선한 인상과 흰 피부에 옅은 화장을 한 모습이다. 긴 생머리와 느슨한 원피스가 그녀를 더욱 단아해 보이게 만들었다. 잠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안녕하세요. 어떻게 오셨나요? 예약은 없었는데….”
목소리도 좋다. 마치 옛날 만화영화에서 들은 귀에 익은 성우의 목소리 같다. 약간은 선한 역할보다는 악역의 목소리를 갖고 있다. 목소리가 악하다는 것은 아니다. 매혹적인 목소리, 끌리는 목소리다. 그리스 신화에서 아름다운 목소리로 상대방을 매혹하는 사이렌과 같은 목소리를 갖고 있다. 그녀의 목소리에 취해 내가 깊은 잠에 빠진다면 나를 공격할 것이다.
“저기요?”
그녀가 취한 나를 깨웠다.
“아! 마음이 힘들어해서 문득 이곳 상담 센터가 생각나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