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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경험 1

은밀하고 위대했던

by 부소유

아빠 그래서 반도체 첫 경험이 뭔데요?


뜬금없이 첫 경험이라니. 과거의 로맨스가 생각나지만 그것이 요점은 아니다.




반도체 첫 경험이 있긴 하다. 때는 1990년대 중반으로 기억한다. 지금 생각해도 그 당시 가난했던 집의 분위기에 비해서는 파격적인 제품이 집에 들어왔다. 586 컴퓨터다. 당시에는 586이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지 몰랐다. CPU의 세대교체로 286, 386, 486으로 올라가며 586까지 올라가던 시절로 그 CPU 이름이 나중에는 거의 고유명사가 되었다. 그 586 컴퓨터는 집에서 단순 게임 기계가 되었지만 MS-DOS와 Lotus, Basic 같은 프로그램도 경험하면서 전산 기계에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었다.


하루는 고사양의 게임을 가동하는데 속도가 너무 느려서 답답했다. 우연하게 학교에서 덕후들의 대화를 엿듣고는 오버클럭이라는 기묘한 방법을 알게 되었고, 알음알음 알아봐서 메인보드의 스위치를 변경하는 방법을 알아냈다. 지금 생각하면 괴담 수준인데 오버클럭을 하다가 화재가 발생했다거나, 컴퓨터를 태워먹었다는 소문도 듣긴 했지만 용감하게 오버클럭이라는 기묘한 방법을 감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스위치를 변경하는 방법은 아주 고전적이었다. 메인보드에 핀을 묶어주는 젠더 같은 녀석을 뽑아서 옆자리에 꼽아보는 것이다. 살짝 겁을 먹었지만 드디어 바꿔 꼽아보고 PC를 가동했다. 놀랍게도 당시 CPU 클럭 속도였던 90 MHz는 100 MHz로 올라갔다. 조합을 한 번 더 바꿔보니 속도가 120 MHz로 올라갔다. 단순한 젠더 위치 변경으로 느껴지는 체감속도가 믿기지 않았다. 그만 올려도 될 텐데 최대 속도가 궁금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떤 위험을 감수하고 그렇게 했는지 모를 실험정신과 근성으로 가득한 중학생이었다. 속도는 결국 당시 CPU spec에서 최대한 낼 수 있던 133 MHz까지 찍었고 어디선가 [삐!] 하는 경고음이 울리며 간헐적으로 PC가 뻗거나 재부팅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120 MHz까지가 안정적으로 최대 속도를 낼 수 있는 조건임을 자체적인 실험으로 알아냈다.




내 첫 경험. 감수성이 충만했던 시기에 나의 엄마, 아빠가 집에 없을 때 몰래 위험을 감수했던 실험. 그 실험 도구가 CPU 오버클럭이었다.


CPU가 뭐냐고? 아뿔싸, 제일 중요한 설명을 빼먹었다. CPU는 Central Processing Unit의 약자로 우리말로 중앙처리장치라고 부른다. 반도체에서는 시스템 반도체에 속한다. 일반적으로 사람의 두뇌에 비유한다. 다시 말해 아주 중요한 반도체 소자다. 난 그 두뇌의 속도를 올리는 첫 경험을 했었다. 인터넷도 PC 통신도 안되던 시절에 그저 덕후들의 말만 듣고 이뤄낸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렇게 했을까 싶은 은밀하고 위대했던 첫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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