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를 위하여

by 부소유

은지는 작가 생활 10년차가 되었다. 여섯 권의 책을 냈고, 문학상도 받았다. 하지만 여전히 작은 작업실에서 글을 썼다. 하지만 이제는 5층이었다. 창밖으로 서울의 지붕들이 내려다보였다. 햇살이 책상 위에 따뜻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민수의 둘째 딸이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은지는 조카의 입학식에 참석했다. 아이는 새 책가방을 메고 씩씩하게 걸었다. 교실은 밝았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선생님이 - 은지 작가님이시죠? 책 잘 읽었어요. 작가님의 글이 교과서에 실렸어요. 은지는 놀랐다. 자신의 이야기가 교과서가 되었다니.


아버지는 일흔이 되었다. 여전히 텃밭을 가꾸고 있었다. 이제는 10평으로 늘었다. 동네 노인들과 함께 도시농업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수확한 채소를 동네 생계가 어려운 주민들에게 나눠주고 있었다. 아버지가 - 받는 것만 하다가 이제야 주는 사람이 됐어, 하며 뿌듯해했다.


어머니는 시집을 냈다. ‘빨래하는 여자들’이라는 제목이었다. 출판기념회에 많은 사람이 왔다. 특히 가정에서 주부로 일하는 여성들이 많이 왔다. 한 여성이 울면서 - 제 이야기 같아요. 제가 못 쓴 말들이 여기 다 있어요, 하고 말했다. 어머니의 시가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있었다.


준호의 카페는 체인점이 되었다. 서울 곳곳에 다섯 개 지점이 생겼다. 모두 반지하가 많은 동네에 열었다. 준호는 수익의 일부를 ‘청년 창업 지원금’으로 기부했다. - 나도 바닥에서 시작했으니까. 다른 사람들도 기회를 가져야지. 준호는 이제 제법 사업가가 되어 있었다.


고모는 재혼했다. 상대는 같은 마트에서 일하던 남자였다. 소박한 결혼식이었지만 고모는 행복해 보였다. - 이제야 내 삶을 사는 것 같아. 늦었지만 행복해. 고모의 얼굴에는 평화가 있었다. 고생 끝에 찾은 평화였다.


은지는 새 소설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미래 이야기였다. 2050년, 지하가 사라진 서울. 하지만 새로운 형태의 계급이 생겨난 사회. 은지는 상상했다. 미래에도 차별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극복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빛을 찾는 사람들이.


어느 날, 낯선 이메일이 왔다. 프랑스 출판사였다. ‘반지하의 빛’을 번역 출간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은지는 믿을 수 없었다. 한국의 반지하 이야기가 프랑스 독자들에게도 읽힌다니. 담당자는 썼다. ‘가난과 차별, 그리고 극복의 이야기는 보편적입니다. 파리의 지하실에 사는 이민자들도 이 책에서 희망을 찾을 것입니다.’


가족 모임이 있던 날, 은지는 오래된 사진첩을 꺼냈다. 1998년 대홍수. 그날 물에 젖었던 그 앨범이었다. 얼룩이 있었지만 사진은 남아 있었다. 어린 은지와 준호, 젊은 부모님, 할머니, 삼촌, 고모. 모두가 거기 있었다. 완벽하지 않았지만 가족이었다.


민수의 큰딸이 사진을 보며 물었다. - 이게 반지하예요? 은지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가 - 왜 땅 밑에 살았어요? 은지는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어. 하지만 우리는 거기서도 행복을 찾았단다. 서로 사랑했고. 아이가 또 물었다. - 그럼 반지하의 빛이 뭐예요? 은지는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말했다. - 사람이야. 어둠 속에서도 서로를 비추는 사람들. 할머니, 할아버지, 엄마, 아빠, 모두가 빛이었어. 아이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언젠가는 이해할 것이다.


준호가 새로운 소식을 가져왔다. - 정부에서 주거 개선 사업 시작한대. 우리 이야기가 영향을 줬대. 은지는 뿌듯했다. 문학이 현실을 바꿀 수 있구나. 아주 조금씩이지만.


2025년 12월 31일, 한 해의 마지막날. 은지는 옛 반지하 건물 앞에 서 있었다. 건물에는 철거 예정 표시가 붙어 있었다. 재개발이 시작되는 것이다. 반지하는 사라질 것이다. 물리적으로는. 하지만 기억 속에는 영원히 남을 것이다.


은지는 건물을 한참 바라봤다. 그리고 작별 인사를 했다. - 고마웠어. 힘들었지만 나를 강하게 만들어줬어. 여기서 시작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 그리고 돌아섰다. 뒤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앞으로, 계속 앞으로.


집에 도착했을 때,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새해맞이 파티를 하기로 했다. 어머니가 떡국을 끓였고, 아버지가 텃밭 채소로 전을 부쳤다. 민수 가족이 케이크를 가져왔고, 준호가 커피를 내렸다. 고모 부부도 왔다. 모두가 한자리에 모였다.


자정이 가까워졌다. TV에서는 타종 행사가 중계되고 있었다. 10, 9, 8...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3, 2, 1. 2026년이 시작되었다. 모두가 건배했다.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은지는 가족들을 둘러봤다. 모두가 나이 들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각자의 방식으로. 은지는 생각했다. 우리는 반지하를 벗어났다. 하지만 반지하가 우리를 만들었다. 그 어둠과 습기와 차별이 역설적으로 우리를 단단하게 했다.


2026년 1월 1일. 새해 첫날. 나는 서른아홉이고, 여전히 쓰고 있다. 반지하는 철거될 것이지만 이야기는 남을 것이다. 우리 가족은 여전히 완벽하지 않지만 함께 있다. 상처는 아물었고, 차별은 줄어들었고, 사랑은 깊어졌다. 이것이 우리가 걸어온 길이다. 반지하에서 시작해 빛으로 나아간 길. 그리고 그 빛은 이제 우리 안에 있다. 영원히.


은지는 펜을 내려놓고 창밖을 봤다.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하얗게, 조용히, 모든 것을 덮으며. 반지하도, 2층도, 5층도, 모두 똑같이 하얗게 덮이고 있었다. 은지는 미소 지었다. 눈은 평등하다. 빛도 평등하다. 언젠가 세상도 그렇게 될 것이다.


그것이 은지가 쓰는 이유였다. 그 ‘언젠가’를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