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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FT의 역사 (중)

NFT의 역사에 대하여

by 부기영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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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 PFP프로젝트의 초석 크립토 펑크.

이더리움을 기반으로 한 첫 ‘PFP’( Profile Picture Project) 장르의 ‘크립토 펑크’ (Crypto Punks)가 등장하였다. 이 프로필 사진으로 기반한 이 프로젝트는 PFP가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게 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각 프로젝트에 담긴 희귀도 및 NFT의 발행량 및 훗날 생겨난 프로젝트들은 크립토 펑크의 영향 아래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크립토 펑크는 총 10,000장의 수집이 가능한 펑크들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펑크(Punk)의 의미 70~80년대 특정 음악 패션 장르 혹은 불량배, 패기만 있고 치기 어린 젊은이들을 뜻하지만, 그 기본에

서는 반항아적이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고자 하는 이들의 모습을 뜻한다. 그렇기에 크립토 화폐 (Crypto Currency)라는 공간에서 NFT가 탄생하고 기존 경제 질서를 반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여줌에 있어서 이 펑크라는 이름이 NFT 프로젝트에 널리 사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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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초기 이더리움 체인의 지갑을 가진 누구라도 신청을 통해 크립토 펑크를 무료로 받을 수 있었다. 프로젝트가 명성이 널리 퍼져나가기 시작 하면서 2차 마켓에서 활발하게 거래되기 시작했으며 현재에 이르러서 크립토 펑크 한 장의 가격은 수억 원에 달한다. 그 시절 크립토 펑크를 소유하고 소위 존버를 했다면 돈방석에 앉았을지도 모른다. 더욱이 이러한 유명세와 더불어서 크립토 펑크만의 민팅기준 10,000장의 물량, 희귀도 등은 추후 나온 타 NFT 프로젝트들의 바이블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크립토 펑크가 남긴 큰 발자국에는 당연히 희귀도 (Rarity)를 들 수 있다. 만장의 각기 다른 펑크들 속에는 아주 희귀한 원숭이와 외계인들이 존재하며 전체 1만 장 중에서 외계인의 9장, 원숭이는 24장, 좀비는 88장이 존재한다. 2017년도 코로나 판데믹이 올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겠지만, 우연의 일치였을까? 번호 7523번 마스크를 쓴 외계인은 2021년 6월 소더비 경매에서 한화 약 140억 원에 낙찰되었다. 다만 여기서 주목할 점은 대부분 무료로 풀렸던 NFT들 중 희귀한 NFT들의 상당수가 라바랩스가 소유하고 있었으며 추후에 라바랩스의 큰 자산 포트폴리오가 되었다는 점이다.






2017년- 크립토키티(Crypto Kitties) 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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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립토키티는 NFT초기에 진입한 프로젝트로서 후세대 프로젝트에 ‘번식과 거래’라는 새로운 영감을 주었다. 크립토키디스의 개발사 대퍼랩스(Dapper Laps)는 2017년 9월 ETH Waterloo 해커톤에서 우승하면서 본격적으로 사업이 시작되었다. 사용자들은 소유한 디지털 고양이들을 사고 팔고 거래하며 번식시킨다.


그리고, NFT에 가진 색상 등 유전 코드를 통해서 교배해 얻은 고양이들은 각기 다른 희귀도를 가지고 태어난다. 이렇게 다음 세대로의 번식시키는 시스템은 차후 P2E (Pay to earn) NFT 게임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육성과 교배라는 시스템은 이전부터 친숙한 고전 게임 다마고치(사이버 애완동물)를 키우는 것과 유사했기에 크립토키티는 NFT에 대중성에 크게 이바지했다. 이에 몇몇 고양이들은 100,000$에 (1억 2천만 원) 거래가 성사되고, 1주일에 6만 명 이상의 사용자와 670만 달러 이상에 도달했다.


하지만 이러한 대중화를 불러왔음에도, 일부 게임업계에서는 크립토키티를 게임이라고 치부하지 않았다. 사행성에 대한 우려, 블록체인 기술의 한계, 게임성에 대한 본질적 부재를 꼬집고 있었다. 특히나, 이더리움의 한계가 크립토키티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미디어상에서 큰 쟁점이 되면서 수많은 이용자가 크립토키티를 구매하기 위해 몰렸다. 초당 평균 15개 거래 가능한 이더리움 네트워크에서 과도한 *트래픽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이로 인해서 증가하는 *가스비(수수료), 지연 현상 때문에 사용자들은 고양이들을 번식하거나 거래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거래 발생 때마다 내야 하는 수수료, 이더리움 네트워크의 수수료 증가 등의 이유로 인하여 크립토키티의 인기는 빠르게 식었고 2022년 현재 이주일 이용자 수는 300명대에 이르렀다. 결국, 근본적인 재미라는 욕구를 채울 수 없는 NFT 프로젝트들은 그 인기가 빠르게 식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단편적인 예이다.




2018~2020: NFT의 빅뱅

디지털아트가 당당히 예술의 한 영역으로써 서서히 평가받기 시작했으며, 유명 NFT를 활용한 게임의 등장, 대 기업들은 실험적으로 NFT를 활용한 서비스를 선보였다.


아일랜드의 비주얼 아티스트인 케빈 아브스(Kevin Abosch)는 디지털 토큰 회사 GIFTO와 협력하여 발렌타인을 기념하는 자선행사를 성공적으로 주최하였다. 그 행사로 그의 작품이 약 10억여 원에 달하는 거래량을 성사시켰다. 그는 이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피를 이용한 100개의 블록체인 거래주소를 적은 실물 작품을 만들어 냈다. NFT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Kevin Abosch의 행보는 타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현대 예술의 거장 중의 한 명인 ‘데미안 허스트’ 또한 NFT 시장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2018년도 NFT 블록체인 게임 중 가장 많은 이용자 수를 보유하고 있는 ‘엑시인피니티(Axie Infinity) ‘가 런칭하였다. 게임을 통해서 돈을 벌 수 있다는 콘셉의 P2E (Pay To Earn)을 대중화 시키는데 기여했으며 지금도 그 성장속도가


2019년도 나이키는 블록체인 NFT기술을 활용하여서 신발의 진품 여부를 확인 할 수 있는 NFT 기술을 (Crypto Kicks) 선보였다. 이를 통해서 US에서 특허를 출원을 했다. 더욱이 명품에 대한 진품과 가품에 판별 기술에 nft를 적극적으로 활용 할 수 있기에 여러 명품 기업들이 앞다투어 NFT를 활용한 프로젝트들을 선보였다.


그리고 2020년 초 코로나가 불어닥친 시간은 NFT에 수 많은 변화를 불러일으킨 변곡점이되었다. 코로나 판데믹으로 인하여 지금까지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세상이 펼쳐졌다.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더 많은 시간을 실내에 머물러야 했으며, 자택근무가 일상화가되고 경제, 문화, 생활에 이르기까 전반적으로 실외에서 실내로,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의 변화가 강제되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잉영 자금들이 주식 및 디지털 자산에 몰리기 시작했고 그 자금을 통해서 NFT와 디지털화폐의 시대가 열렸다. 유럽 중앙은행은 ECB (European Central Bank)의 리더인 크리스틴 라가드는(Christine Lagarde)2020년도 말 세상이 디지털 시대로 접어들면서 본질적 자금 뿐만 아니라 상품 및 서비스가 빠르게 변화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발언을 하였다.


빠르게 시대의 트렌드는 NFT와 메타버스 키워드로 좁혀졌다. 그 결과 마치 서부개척 시대와 같이 많은 이들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메타버스 부동산 디센트럴 랜드, 더샌드박스 등이 주목받기 시작했고 개발자와 아티스트들이 만들어낸 소규모의 프로젝트 BAYC, COOLCAT 등이 큰 성장을 이룩했다. 코로나 이전부터 메타버스, NFT 관련 사업을 준비하고 있던 플랫폼 및 기업들은 그 수혜를 톡톡히 보았으며 성장기에 접어든 NFT프로젝트들과 NFT예술 분야는 이제 대중들 속에서 그 존재감을 뽐내기 시작했다.






© 이 게시글은 "NFT 오답노트" 책의 일부를 발취한 것이며 계약에 따라 발행한 것이므로 지은이의 서면 허락 없이는 어떠한 형태나 수단으로도 이 책의 내용을 이용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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