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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ogie Woogie Feb 08. 2021

내가 춤출 수 없다면 나의 혁명이 아니다!

아프로비트를 창시한 혁명가, 펠라 쿠티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까지 노동 운동, 페미니즘, 반전운동 등에 투신한 아나키스트 엠마 골드만은 "내가 춤출 수 없다면 나의 혁명이 아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녀는 혁명이란 그 어떤 약자도 배제하지 않는, 모든 사람이 춤추며 환영할 수 있는 방향으로 추진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록 그녀의 의도와는 다르더라도, 오늘은 그녀의 말을 곡해하고 싶다. 혁명은 춤을 출수 있을 정도로 신이 나야만 한다고. 


"Music can change the world, because it can change people." 
"음악은 사람을 바꾸기 때문에, 세상을 바꿀 수 있어요."

-Bono, U2

그런 혁명은 정치적 참여에 앞장서는 뮤지션들의 이상이기도 하기 때문에, 수많은 이들이 부단히 애를 쓰고 있다. 하지만 과연 대중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는 것만으로도 세상이 바뀔 수 있느냐는 의문을 유발하기도 한다. 정치적 이슈에 목소리를 내기를 주저하지 않는, 밴드 U2의 보컬 보노는 이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는다. 세상을 바꾸는 게 목표라면, 노래를 할 게 아니라, 행동으로 보이라는 것이다. 보노는 이런 비판에 대해, 자신의 관점을 밝혔다. 음악은 세상을 바꾸는 주체인 사람을 바꾸기 때문에, 결국 음악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말이다. 간단한 논리이지만, 많은 이들을 설득하지 않았을까.


길-스캇 헤론은 진정한 혁명은 중계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혁명이란 단어에서 굳이 체제를 뒤엎는 중대한 역사적 사건을 연상할 필요는 없다. 길-스캇 헤론은 'The Revolution Will Not Be Televised'에서 "진정한 혁명은 중계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진정한 혁명은 TV 뉴스에 나올 만큼 거대한 사건들이 아니라, 개개인 마음속에서 어느 순간 일어나는 사소한 변화일 수도 있는 것이다. 혁명의 의미를 여기까지 확장시켜 본다면, 음악이 혁명을 일으킨 사례는 많다. 그것도 아주 신나는 혁명들을 말이다. 나이지리아의 음악가, 펠라 쿠티는 그중에서도 가장 진취적인 혁명을 일으켰다.



펠라 쿠티의 생애

펠라 쿠티 (Fela Kuti) 1938~1997

펠라 쿠티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나이지리아 태생의 펠라 쿠티는 자신의 밴드의 보컬이자 색소폰, 트럼펫, 기타와 키보드를 연주한 멀티-인스트루멘탈리스트이며, 작곡가이고,  범-아프리카주의자이고, 일부다처주의자이며, 정치 활동가이고, 자신이 건국한 공화국의 지도자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는 혁명가이다. 


쿨라 로비토스, 펠라 쿠티는 트럼펫을 연주하고 있다.

펠라 쿠티(Olufela Olusegun Oludotun Ransome-Kuti)는 1938년, 당시 영국령 식민지였던 나이지리아의 유복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반식민 페미니스트였던 어머니와 성공회 목사이자 교장이었던 아버지로부터 진보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1958년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영국으로 향했던 음악을 택한다. 트리니티 대학에서 트럼펫을 배우던 그는 재즈와 가나에서 유행하던 하이라이프(Highlife) 장르의 밴드, 쿨라 로비토스(Koola Lobitos)를 결성하지만, 본국으로 귀국하면서 해체한다. 1963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신생 나이지리아 공화국으로 돌아온 펠라 쿠티는 쿨라 로비토스를 재조직하고, 라디오 방송국에서 DJ로 일하며 음악을 이어 나간다. 

산드라 이자도레와 펠라 쿠티

1967년, 펠라 쿠티는 음악적 영감을 위해, 하이라이프의 본국인 가나로 향하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하이라이프, 재즈, 펑크, 칼립소, 그리고 요루바(타악이 중심이 되는 요루바 족의 전통 음악)를 결합한 음악의 형태인 '아프로비트'의 개념을 창시하기에 이른다. 아프로비트에 대한 자신으로 부푼 펠라 쿠티는 1969년에 밴드와 함께 미국의 로스앤젤레스로 향한다. 당시 미국은 흑인 민권 운동이 열렬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펠라 쿠티는 흑표당원(흑인 민권 운동의 급진적이고 과격한 주축)이던 산드라 이자도레로부터 정치와 사회 운동에 대해 배우게 된다. 그는 정치 및 사회 운동에 눈을 뜨게 되고, 그의 밴드 이름을 '나이지리아 '70'으로 바꾸기도 한다. 


펠라 쿠티와 밴드원들은 취업 허가를 받지 않고 미국으로 온 것이 문제가 되어, 미국이민국에 의해서 나이지리아로 쫓기듯이 돌아오게 된다. 나이지리아로 돌아온 펠라 쿠티는 아프리카의 현실을 바꿔보겠다는 생각으로 밴드의 이름을 'Afrika '70'으로 명명한다. 이때부터, 펠라 쿠티는 기존에 다루던 사랑과 같은 주제를 버리고 본격적으로 정치적 이슈에 집중하게 된다. 당시 나이지리아는 연이은 군부의 쿠데타로 군인들이 정권을 잡는 상황이었는데, 펠라 쿠티는 그의 레코딩 스튜디오를 '칼라쿠타(Kalakuta)' 공화국이라고 이름을 지으며, 나이지리아 정부로부터 독립을 주장하기도 한다. 


펠라 쿠티의 레코딩 스튜디오이자 칼라쿠타 '공화국'은 화재로 소실 이후, 박물관으로 복원되었다.

펠라 쿠티의 '공화국'과 음악적 행보는 나이지리아 정부를 격분케 했다. 특히 1977년, 나이지리아 군인들을 비판하는 노래인 "Zombie"는 나이지리아 정부를 폭파시키는 기폭제가 되는데, 천여 명의 군인이 칼라쿠타 공화국을 점거하고 거주민들을 폭행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펠라 쿠티 본인도 두개골 등에 골절상을 입었고, 77세의 고령이었던 펠라 쿠티의 어머니는 창문에서 던져져서 중상을 입고, 후유증으로 다음 해에 사망하기도 한다. 군부는 불을 지른 후, 수 시간 동안 소방대의 투입을 저지하면서, 칼라쿠타 공화국은 잿더미가 된다. 


하지만 펠라 쿠티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MOP(Movement of People, 대걸레라는 뜻도 있음)라는 정당을 만들었다. "대걸레처럼 사회를 청소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대통령 선거에 출사표를 던지기도 했지만, 나이지리아 정부에 의해 거부당했다. 펠라 쿠티는 밴드의 이름을 세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바꿔, 이집트 '80이라 이름 붙였다. 아프리카의 정신을 문명의 요람인 이집트에서 찾겠다는 바람에서였다. 1984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인 출신 대통령 모하마두 부하리는 자신에 대한 반대 성명을 낸 펠라 쿠티를 투옥하기도 했다. 국제앰네스티와 저명한 인사들은 그의 석방을 위해 싸웠다. 


사진 1: 펠라 쿠티와 루 리드, 사진 2: 시옹 쿠티와 이집트 '80 사진 3: 마데, 페미 쿠티 부자

에이즈로 1997년에 사망하기 전까지, 펠라 쿠티는 왕성한 음악과 정치 활동을 했다. 석방 후에도 펠라 쿠티는 보노, 산타나, 루 리드 등과 세계적인 뮤지션들과 같이 무대에 오르고, 같은 정치적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펠라 쿠티는 생전 27명의 부인과 결혼했는데, 이들과 낳은 자식들은 아버지의 정신을 이어받고 있다. 시옹 쿠티(Seun Kuti)는 아버지의 밴드, 이집트 '80의 명맥을 지금까지도 유지하고 있으며, 페미 쿠티(Femi Kuti)도 아프로비트의 거장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는 자신의 아들인 마데 쿠티와 함께 음악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데, 펠라 쿠티의 정신은 벌써 3대째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펠라 쿠티의 음악

'Ye ye de smell' - <Live!> (1971): 펠라 쿠티는 1960년대 런던에서 체류 중일 때, 소중한 인연을 만난다. 바로 드러머 진저 베이커이다. 기타리스트 에릭 클랩튼과 크림, 블라인드 페이스를 결성한 것으로 유명한 진저 베이커와 펠라 쿠티의 인연은 계속된다. 아프리카의 리듬을 배우기 위해, 아프리카를 여행하던 진저 베이커는 펠라 쿠티와의 공연을 녹음해서 내놓는다. 롤링 스톤 지에서 50대 라이브 앨범으로 선정되기도 한 이 앨범의 'Ye ye de smell'은 타악이 중시되는 아프리카 현지 음악이 어떻게 아프로비트에 영향을 주었는지 보여주는 좋은 곡이다. 영상은 2013년 진저 베이커의 연주이다. 참고로 펠라 쿠티의 음악은 현지어와 동시에 영어가 자주 사용되는데, 이는 영어를 통해 최대한 많은 아프리카의 군중에 다가가기 위한 그의 생각이 담겨있다고 한다.

'Zombie' - <Zombie> (1977): 펠라 쿠티는 군인들이 좀비나 다름없다며, 그들을 풍자하는 곡을 내놓는다. 가사에서 그는 개인성을 말살하는 제식을 풍자하고, 그들은 "죽이라 하면 죽이고", "뇌도 없고, 일도 없고, 상식도 없다"라며 군인들에 대한 비판을 계속한다. "좀비!"라는 여성 코러스가 약 올리듯, 펠라 쿠티의 수위 높은 가사를 잇는데, 군인들이 분노했을만하다. 당시 나이지리아는 공화국이었지만, 군부의 압제 하에 있었고, 빈번한 쿠데타가 일어나던 국가였다. 이러한 자국 상황에 분노한 펠라 쿠티는 용감하게도 군부에 직접 비판의 칼날을 겨눈 것이다. 이로 인해 격분한 나이지리아 군부는 1000여 명의 군인을 보내 그의 레코딩 스튜디오이자 집인 '칼라쿠타 공화국'을 불태우고, 그와 주변인을 구타한다.

'I.T.T.' - <ITT> (1979): 제목인 ITT는 나이지리아의 국영 통신회사인 International Telephone & Telegraph를 의미한다. 하지만 펠라 쿠티는 'International Thief Thief'(세계적 도둑)라고 비틀어서 조롱한다. 당시 ITT는 회장 아비올라의 군부와의 개인적인 친분을 바탕으로 나이지리아의 군사 정권의 지원을 받고 있는 회사였고, ITT를 비판함으로써, 펠라 쿠티는 아비올라와 군사 정권을 비판한다. 그는 세계적인 도둑들이 나이지리아에서 '쥐새끼'들처럼 구석에서 번창해서, 처음에는 기자와, 장관들과 그리고 마지막엔 대통령과도 친분을 쌓으며 돈을 훔치고, '부패, 인플레이션, 억압, 혼란'을 일으킨다고 말한다. 하지만 여기서 펠라 쿠티의 비판은 끝나지 않고, 아프리카를 식민화한 유럽인들에게도 향한다. 자유로운 민족들을 노예화하고, 이제는 자본을 통해 아프리카를 좀먹는 국제기업들에 대한 비판은 통렬하다. 이렇게 밝은 곡이 그렇게 날카로운 비판을 담고 있는 모습에서 펠라 쿠티의 신나는 혁명을 엿볼 수 있다.

'Beast of No Nation' - <Beast of No Nation> (1989): 'Beast of No Nation'은 초반의 혈기왕성하던 모습에 비해, 성숙하고 차분한 펠라 쿠티의 모습을 보여주는 곡이다.  이 곡은 펠라 쿠티가 1984년부터 21개월간 동안의 수감 생활 후, 처음으로 작곡한 곡이라고 한다. 국제앰네스티의 도움으로, 모범수로 조기 석방된 그는 미국의 뉴저지에서 앰네스티 기금을 위한 공연을 했다. 당시 미국의 한 호텔에서, 펠라 쿠티는 TV 속 아파르트헤이트의 보타를 보고는 "짐승"이라 욕하며, 우리도 "봉기하여 우리 내면의 짐승을 보여주자"라고 했다. (앨범 아트에 "This uprising will bring out the beast in us") '그래서인지 앨범아트에는 보타가 마가렛 대처, 로널드 레이건 등과 함께 뿔이 달린 우스꽝스러운 악마로 그려지고 있다. 'Beast of No Nation'은 넷플릭스 오리지널로도 영화화된 아프리카 소년병의 현실을 다룬 소설의 제목이 되기도 했으며, 2020년에 있었던 반정부 시위에서도 사용되었을 정도로 아직도 나이지리아 국민들에게는 중요한 곡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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