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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개 Feb 22. 2023

어느 지방대생의 인생 마지막 졸업

타이틀을 굳이 자극적으로 쓴 것은 '학벌 편 가르기'를 하자는 의도가 아니다. 나는 4년제 지방 국립대를 졸업했고, 만약 학벌이 주제였다면 자연스럽게 전문대, 고졸 등이 불편해할 것을 알고 있다. 아서라, 나 역시 그 불편함을 일부 공감하고 있으며, 이 글은 그런 불편함에 대해서 얘기하는 게 아니다. 그저 누군가의 부끄러운 아들이 학교라는 사회에서 어떻게 버텼는지를 썼을 뿐이다.


나는 지방을 전전하다 중학교 2학년 때, 서울로 상경했다. 당시 우리 가족은 친누나의 '인서울 대학' 합격 소식에 힘입어 고향인 서울로 복귀하자는 프로젝트를 과감하게 실행했고, 질풍노도의 시기에 나는 서울깍쟁이들 사이에서 적응하지 못했다. "은근히 왕따"라는 뜻의 '은따'에서 대놓고 반감을 드러내는 왕따 그 사이에 머물렀고, 내가 기억하는 중2는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아빠는 하교 후 집에 들어가지 않고 빙빙 도는 나를 본 적이 있다고 한다. 그때부터 나는 철이 든 것처럼 감정을 숨기기 시작했지만, 아이처럼 애정 또한 갈구하는 감정적 장애를 얻게 된 거 같다.

썩 유쾌하지 않았던 중학교를 졸업하고 평판 좋지 않은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나는 두려움이 컸다. 남고라는 이미지와 나를 괴롭혔던 몇몇 친구들이 고등학교에 같이 왔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좋은 친구들을 만났고 재수라는 성적표에도 불구하고 행복하게 졸업했다. 돈을 아끼기 위해 편의점 빵으로 두 끼를 대체하던 1년을 보낸 후, 그렇게 바라던 대학생이 됐지만 이 역시 실망스러웠다. 현역 당시에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유명한 학교, 신생 학과를 1차 합격했기에, 기대도 컸고 나의 욕심도 컸지만 결국에는 지방 국립대. 이마저도 삼수는 안 된다는 무언의 압박에 휘둘려 쓴 대학이었다. 엄마는 명절 때 내가 다니는 학교에서 가장 높은 학과를 들먹였다고 한다. 결국에는 들킬 거짓말인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부끄러운 아들은 타지 생활을 시작했고, 21살부터 물리적으로도 홀로서기에 시작한 나는 뒤늦은 사춘기를 맞이한다. 당시의 연애도 변변찮았고, 집안 환경과 돈벌이 모두 좋지 못했다. 그때가 처음으로 병원을 간 날이었다. 나는 상담을 받았고, 혼자서 잘 버티고 있다는 의사의 칭찬에 힘입어 약물 투약을 거절했다. 그렇게 군대를 갔고, 내 첫 연애는 탈모를 불러일으킬 만큼 끔찍했다. 그 사람이 준 상처는 중학교 시절의 감정적 장애와 곁들여져 기형적인 사랑을 하게 만들었다. 순전히 나는 그때부터 망가진 인형이었다.

그 망가진 인형도 복학하면 아저씨다. 저학년 시절에는 나를 좋아하는 사람보다 싫어하는 사람이 더 많았고, 내가 어떤 짓을 하던 좋은 얘기는 듣기 어려웠다. 복학 이후에는 운이 좋게 나를 좋게 봐주는 사람들이 더 많았고, 나름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시도해 볼 수 있었다. 낮에는 공부하고, 알바 2개를 병행했고, 대외활동을 위해서 잠을 아껴야만 했지만 적어도 탈모는 생기지 않았다. 시간을 쪼개 술 한 잔을 하는 시간도 만들었고, 마음에 맞는 사람들을 만나 별 걸 다 시도해 봤다. 가상창업과 체육 실기 클리닉은 내 기억 속에 남는 정말 특이한 경험이었다. 시사 스터디 그룹도 만들었고, 정식 동아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를 이어 4기째 운영 중이다.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고학년을 보냈다.


그리고 졸업까지 해냈다. 원하던 학점과 바라던 직장까지 얻은 상태로 졸업에 골인했으니 시원할 거 같았는데 섭섭이 조금 더 크다. '돈벌이에 시달리지만 않았으면, 더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과 '놀아야 할 시기에 놀지 못해서 노는 법을 모르는 것 같다'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물론 놀면서 공부하는 것만큼 대단한 일은 없고, 두 마리 토끼 중 하나는 놓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인간관계에 대한 회의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내가 그르친 관계가 너무 많다는 생각에 졸업식 날 거나하게 취해야만 했다.

'꼰대' 소리는 더 듣겠지만, 그래도 후배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한다. 놀 수 있을 때 놀라고, 연애할 수 있을 때 연애하라고, 술이 편하게 들어갈 때 즐기라고. 나는 더 이상 맘껏 놀지도 못하고, 고장 난 상태라 연애는 꿈도 못 꾼다. 술은 편한 자리보다 불편한 자리에서 더 많이 마신다. 세상 다 산 것처럼 말한다는 불평도 듣겠지만, 그래도 나는 더 생각 없이 살았던 그때가 더 좋았다. 나 스스로를 더 즐기며 살았어야 했는데, 그때의 나는 참 예민하고 유약했으며 사람들이 주는 상처를 받아칠 자존감이 부족한 나머지 숨기에 급급했다.


잘 모르겠다, 나는 그들에게 어떤 선배이고 동기이고 후배였을까. 군대를 전역했을 때도 비슷한 생각을 했던 거 같다. 내가 없었다면 더 행복한 집단이 되지 않았을까. 내가 그들에게 사실 악영향을 미치는 사람이지 않았을까. 그전까지 그들과 어울려야만 했던 당위성이 있었는데 이제는 그 명분마저 사라졌다. 그들에게는 희소식이 되지 않았을까, 따위의 생각을 하게 한다. 아끼는 동생의 말처럼 마음의 벽을 낮췄어야만 했는데, 나는 끝까지 솔직하지 못했다. 이게 내 인생 마지막 졸업의 가장 긴 여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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