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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민 Oct 13. 2024

할미와 LA

할미는 내 엄마였다. 그건 사실 특별한 일이 아니다. 나에게만 유별나게 있는 일도 아니다. 아이를 먹이고 재우고 키우는 사람, 엄마란 게 별 거겠는가. 그럼에도 할미는 내 엄마가 맞았다. 여러 의미로.


열여덟에 나를 낳아 정성으로 길렀던 엄마는 언젠가부터 내 기억 속에 빈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그 기억의 빈 공간을 할미가 대신 채웠다. 그것도 열심히. 할미는 거부할 수 없는 운명처럼 나를 사랑했다. 자기 자식이 버려두다시피 한 자식을 거두어 다시 자기 딸로 사랑을 주고 키웠다.


할미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늘 말했다.


”해인아, 우리 LA로 가자. 우리 둘이. 할미가 돈 모으고 있어. 그것만 모이면 우리 둘이 가는 거야. 몰래.”


갓 오십이 넘었던 할미는 그렇게 몰래몰래 돈을 모았다. 우리 둘의 탈출을 위해서.


왜 LA이여야만 했는지는 잘 모른다. 그저 할미는 내가 영어를 할 수만 있다면 잘하게 되고, 제대로 학교를 다니고, 무엇보다 더 나은 기회를 주고 싶다고만 했다. 그러려면 우린 여기서 반드시 탈출해야 한다고. 그 말만 할 뿐이었다.


할미는 매일매일 나를 정성으로 챙기며 딱 죽지 않을 정도까지만 일을 했다. 내가 열여섯이 되던 해의 어느 날 할미가 말했다.


“해인아, 이제 때가 됐어. 가자”


그러나 나는 선뜻 할미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할미를 따라가기에는 내 머릿속 빈 공간을 채우지 않고서는 어딜 가도 빈껍데기로 살 것만 같았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이렇게 해버렸다.


“할미, 난 갈 수가 없어. 여기… 엄마가 있잖아”


사실 그동안 말로만 했었지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던 그 일을 실제로 실현해 나가야 한다는 두려움도 나를 주저하게 만든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치사하게 엄마 핑계를 대었다. 열여섯의 내가 할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치사한 방법을 쓴 것이다. 나의 엄마이자, 엄마의 엄마인 사람에게.


할미는 잠시 말이 없다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해인아… 할미는 이제… 가지 않으면 못 살아. 할미는 가야 돼…”


청천벽력의 말이었다. 할미는, 내 엄마는 내가 안된다면 언제나 안 되는 사람이었다. 누구보다 나를 사랑했고 나를 키우기 위해 존재한 듯 보인 사람. 그런 사람이 이제 더는 안된다고, 떠날 수 있으면 같이 떠나고 안 된다면… 그래도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 나를 두고라도.


“할미… 나 없이 살 수 있어?……”


차라리 대답하지 않아 주었으면… 했던 답을 들었다. 그리고 얼마 뒤 할미는 떠났다. 할미가 떠나고 며칠 뒤, 동네 아는 할미의 친구로부터 할미가 잘 도착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렇게 할미의 소식을 들은 것은 그날이 마지막이 되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는 엄마가 나를 낳은 열여덟 살이 되었다. 엄마와 함께 살고 있지만 ’나의‘ 엄마는 이제 없다. 이제와 후회해 봤자 소용없다. 그저 할미의, 엄마의 새로운 삶을 멀리서 축복할 수밖에.


할미가 죽지 않을 만큼만 쉬고 일하던 시절, 나를 태우고 다녔던 낡은 자전거를 타고 열여덟의 나는 생계를 해결하러 달린다. 삶은 괴롭기도 하지만 이렇게 달리는 순간만큼은 가슴속 어딘가가 채워지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지난날 치사한 변명을 했던 나에 대해. 사실 내 마음의 빈 공간은 애초에 없었는 지도 모른다. 할미를, 엄마를 생각하면 달리는 이 순간 가슴이 벅차오르는 걸 보면.


나의 엄마는 나를 마음으로 버렸지만 또 다른 나의 엄마는 나를 있는 힘껏 사랑해 키웠다. 그리고 새 어미가 새끼가 다 크면 그저 떠나 버리듯 떠났다. 하지만 난 알고 있다. 나는 누구보다 큰 사랑을 받았다는 걸. 사실 치사한 변명을 하고 있던 그 순간에도 알고 있었다는 걸.


그 사랑을 아는 나는 앞으로도 잘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간 나도 그 LA에 갈 수 있을 것이다. 할미의 꿈이 있다는 그곳으로. 그때 할미에게 엄마에게 말할 수 있을까, 사랑해줘서 고마웠노라고. 그것이 나를 살게 하고 지금도 가슴 뛰게 만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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