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시대, 보건교사

보건실은 학교의 골디락스 지대?

by 붉나무

AI시대에는 사람의 시간, 숙련, 다정함, 신뢰의 가치가 더욱 커질 것이다.

학교는 모든 직원의 역할이 그래야겠지만 특히 보건실은 숙련도와 다정함, 신뢰가 필요한 곳이다.


별 것 아닌 것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보건실에 오는 아이를 보건교사들은 흔히 단골이라고 부른다.

배가 아프다고 와서 찜질을 하고 보내면 잠시 뒤에는 머리가 아프다고 온다. 열이 없어 물만 마시고 교실로 보내면 한두 시간 후에 손톱을 물어 뜯어 피가났다며 또다시 나타나는 식이다.

겉으로는 서로 다른 증상을 호소하지만, 사실 이런 아이들 뒤에는 정서적 어려움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정서적 어려움의 중심에는 대개 ‘불안’이라는 감정이 자리하고 있다.


요즘 아이들은 실제로 위험한 세상에 살고 있기보다 위험하다고 느끼게 만드는 정보 속에 살고 있다.

뉴스, 유튜브, 친구 관계, 어른들의 불안은 아이들에게 그대로 스며든다. 아시다시피 불안은 본래 생존을 돕는 감정이지만, 과도해질 때 문제다. 아이들의 일상 기능을 서서히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정신건강 문제가 급증하는 추세와 함께 보건실에도 신체적 건강 문제로 오는 아이들보다 ‘역기능적 불안’으로 힘들어하는 아이들이 훨씬 많다는 것은 대부분이 아는 사실이다.

이런 아이들에게서 아이들이 겪는 어려움을 읽으려면 오랜 시간 쌓인 관찰과 반복된 만남이 필요하다.


아이들은 손톱을 뜯는다든가 구역질이 난다든가 하는 증상으로 오기도 하는데 보건실은 그런 문제를 해결을 할 순 없지만, 불안이 증폭되는 흐름을 잠시 멈추게 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보건실에서 어떤 불안한 상황을 말로 표현할 때 바람직한 방향으로 생각을 정리해준다든가, 신체적 증상이 나타났을 때 심호흡을 시킨다든가, 대화의 소재를 포착해 짧은 대화를 하는 걸로 잠시 그 불안을 멈추게 도와줄 때가 있다.

이런 문제로 보건실에 자주 오는 아이들에게 보건교사의 역할은 아이의 일상을 판단하지 않고, 그저 아이가 자신의 원래 감각으로 돌아올 수 있는 상태로 도와주면 충분하다. 이런 아이는 이후 상담교사와 지속 상담을 하거나 해결이 어려운 경우 상담교사를 거쳐 외부 전문가와 상담을 하는 경우가 바람직하다.


불안이 증폭되는 사회에서 아이들은 보건교사가 자신을 어떻게 대했는지 안다.

‘어떻게’라는 단어에는,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개인적 취향부터 전문적인 태도까지 다양한 의미가 담길 수 있다. 아이들은 ‘보건실”이 아니라 '보건선생님'을 떠올릴 것이다.

호명사회에서 보건교사는 자기 이름을 책임지는 존재로서, 과잉 친절도 냉담함도 아닌 적절한 태도로 항상 보건실이라는 공간을 지켜야 할 것이다. 여기서 '적절한‘은 보건교사 자신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보건실을 이용하는 아이들 관점에서 평가될 것이다.


다정함이란 말을 많이 건네거나, 적당한 목소리로 나긋나긋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말을 걸수록 부담을 느끼는 아이도 있기 때문이다. 다정함은 아이의 삶에 참견하거나 훈계하려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다시 올 수 있는 안정감을 남겨두는 것이다.

그래서 보건실은 적절한 거리와 지금 아이의 상황에 맞는 말이 필요하다. 그것을 잘 포착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경험과 노력이 요구된다고 본다. 나 역시 이 부분에서 매번 부족함을 느낀다. 그래서 이 글을 쓰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영국 동화에서 유래한 ‘골디락스 지대’처럼, 보건실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공간이어야 한다. 지나치게 다가가면 아이는 숨이 막히고, 너무 멀면 냉정하게 느껴질 것이다. 적당한 관심, 적당한 침묵, 적당한 보건교육. 이 균형이 아이가 스스로 자신의 상태를 받아들이고 정리한 다음 교실로 돌아가도록 돕는다. 그 균형은 아이와 보건교사가 만들어가며 서로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규모가 작은 학교는 이미 보건교사는 아이들과 더 친밀한 관계로 존재하고 있다. 핵개인으로서의 보건교사는 보건실에서 만나는 다양한 아이들과의 관계에서 아이들과 더 자주 마주해 온 축적된 시간에서 형성된다. 보건교사의 전문성도 그렇다. 보건교사의 역할은 모든 학교가 일률적인 전문성으로 일반화되기 더욱 어려운 상황으로 가고 있다. 매뉴얼은 언제나 현재 상황보다 한발 늦다. 이미 만들어진 매뉴얼은 지금을 대변하기 어렵다. 아이들과 반복된 만남 속에서 설명할 수 없는 감각으로 길러진 태도, 말보다 먼저 전해지는 안정감, 아이들은 아이들이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을 정확히 직감한다.


불안의 시대에는 어느 곳에서나 ‘완충지’가 필요하다. 지금 아이들이 보건실로 오는 핵심 이유는 질병이나 외상보다 불안의 과잉이다. 쏟아지는 정보와 공부 압박, 끊임없는 비교가 초, 분 단위로 이루어지고 있다. 앞으로 보건실은 불안을 잠시 내려놓게 하는 완충지이자 상담실로 가는 중개자 역할이 더욱 요구될 것으로 보여진다.


이런 핵개인 시대에는 자칫 보건교사가 길을 잃고 헤매거나 쉽게 소진될 수 있다.

빠른 변화의 소용돌이에서 이리저리 휘둘리다 보면 '어디까지가 내 역할인가’가 점점 불분명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스로 내가 책임질 수 있는 한계를 설정해야 한다. 즉, 자기 경계를 명확히 인식하고 그 테두리 안에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핵개인이라 함은 혼자가 아니다. 오히려 선택적 연대의 중심이 된다.

담임, 상담교사, 학부모와의 협력에서도 ‘보건실 담당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아이를 많이 본 사람’ 중 하나로서 발언권을 가지게 된다.

이때 아이의 누적 기록, 그 아이의 보건실에서의 특이 행동이나 말을 적은 것은 그 아이의 치료 방향에 결정적 도움이 되기도 한다.

보건교사는 5년이라는 기간동안 한 학교에 있으면서 적어도 단골 아이들을 만나면서 자신만의 언어로 자신만의 기록을 축적해야 한다. 이건 핵개인만이 가질 수 있는 힘이라고 생각된다.


보건교사가 핵개인이 될 때, 보건실의 성격이 바뀐다. 핵개인이 있는 보건실은 소란하고 복작대도 보이지 않는 규칙이 있고, 효율적이지만 차갑지 않다.


아이들은 '마음이 힘든데 몸이 아파서 가는 곳'이 아니라 '자신도 잘 모르겠는 몸과 마음의 결합상태를 누군가 말로 표현해 안심을 주는 장소'로 보건실을 택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보건교사는 각자 핵개인으로서 소진되지 않는 경계 설정법을 스스로 정해야 한다.


첫째, 아이들의 요구를 다 들어주려한다거나 그 아이를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언제나 열려 있는 사람이되 스스로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마음을 아이에게 열어줘야 한다. 자신이 할 수 없는 부분은 부모, 상담교사나 담임교사에게 알려야 한다. 아이의 이야기를 듣는 것과 해결하는 것은 다르다. 보건교사의 역할은 아이가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갈 수 있도록 잠시 곁을 내어주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함께, 그 다음은 아이의 몫’이라는 선을 마음속에 그어 둔다.


둘째, 다정함의 양을 조절한다.

기분에 따라 아이에 따라 들쭉날쭉해지지 않도록 늘 비슷한 온도와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대할 때 신뢰 관계는 지속된다. 특정 아이에게 모든 에너지를 쏟아버리지 않기 위해, 다른 아이들을 위한 여백을 남겨두자.


셋째, 보건실에서 보건교사가 아닌, ‘나’로 돌아오는 의식을 정한다.

나는 그 방법으로 보건실에서 식물을 기른다. 출근해서 커피를 마시며 식물들에게 물을 주거나 시든 잎을 떼어내면서 하루 업무를 시작한다.


넷째, 적절한 쉼이 필요하다. 주어진 연가를 모두 쓰지는 않지만 학교의 상황과 나의 업무량, 몸과 마음의 상태를 고려하여 조퇴를 재충전의 기회로 삼는다. 이러한 시간은 이후 아이들을 만나는 데 새로운 활력이 된다.


핵개인으로서의 보건교사는 어떤 상황을 즉각 읽을 줄 알고 맥락을 파악할 줄 알며, 아이의 상태에 맞게 온도를 조절할 줄 안다.

즉, 보건교사가 핵개인이 될 때, 효과적인 응급처치는 물론 요즘 아이들이 겪는 어떤 상황에서 겪는 불안, 공부 스트레스, 정보 과잉, 타인의 감정이 겹쳐 만드는 불안을 분산시키는 개인 단위의 안전장치가 될 수 있으리라 짐작한다.

다만 보건교사 스스로 변화하는 위치와 역할을 어떻게 자각하느냐는 학교의 규모, 지역사회의 특징, 학교라는 단위의 특성, 개개인의 역량에 따라 다르기에 일반화되긴 어려운 문제다.


친구들의 의심 때문에 그 관계의 어려움을 겪는 어떤 아이를 만난 적 있다. 일상이 늘 불안한 그 아이로부터 상담실에 가는 것조차 친구들 눈치가 보여 꺼려진다는 고백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런 아이에게 최후의 보루가 보건실이 될 수밖에 없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없었다.


정리하자면, AI 시대에 핵개인은 자동화될 수 없는 영역을 맡는 사람이다. 학교에서 보건교사의 숙련도는 데이터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과 마주하며 쌓아온 시간과 신뢰 관계 속에서 서서히 축적된다. 즉, 아이 한 명 한 명을 더 자세히 읽으려는 태도로부터 온다. 그리하여 보건교사는 사람을, 성장하는 아이를 읽는 힘, 그것이 보건교사의 자질중 하나가 될 것이다.


* 위 글은 송길영 <시대예보 호명사회>를 읽고 내 직업인 보건교사는 AI시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지를 고민하며 썼다. 핵개인, 호명사회, 골디락스 예시는 책에서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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