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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존책방 May 05. 2022

'희생자 역할'은 이제 그만!

'진짜 나'는 누구일까?


남편, 아빠, 아들, 직원, 작가. 내 페르소나 중 가장 좋아하는 것은 '작가'다. 다른 역할은 내 실제 모습보다 잘하려고 애써야 하지만, 글을 쓸 때만큼은 가장 나답다. 내가 쓴 글에는 내 솔직한 모습이 보인다. 멀티 페르소나를 가지고 살다 보면 어떤 역할이 실제 나인지 모르고 살게 된다. 직업이 자신이라 생각하면 해야 할 일을 잘 처리하지 못했을 경우 자신에게 실망한다. 일이 잘못된 것뿐인데 말이다. 진정한 나는 어떤 역할이 아니다. 그렇다면 '진짜 나'는 무엇일까? 어떤 일을 해야만 하는 '역할'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 내가 느끼는 감정이 곧 나다. 유튜브나 SNS, 쇼핑앱에서 추천하는 알고리즘을 보면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원하는 사람인지 쉽게 알 수 있다.

가족 안에서 나의 '페르소나'?


가족 안에도 페르소나가 존재한다. 부모가 '부모 역할', 자녀가 '자녀 역할'을 하면 가장 이상적이지만, 많은 경우 역할이 뒤바뀐다. '브래드 쇼'는 <가족>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 자신에 대해 처음으로 갖게 된 신념들은 나를 대하던 어머니의 감정들과 어머니가 나에게 원하고 바라던 것들로부터 형성되었다." 수치심이 있는 부모는 아이에게 수치심을 전가한다. 아이는 '자신의 감정을 포기해야 사랑받을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을 배운다. 내가 결혼 전 가족 안에서 맡았던 역할은 '부모의 부모'역할이었다. 아이 입장에서 부모의 사랑은 목숨과 같아서 생존을 위해 자신의 욕구를 포기하고 부모를 돌본다. 부모를 책임져야 한다는 잘못된 믿음이 생기기 충분했다.


건강한 가정일수록 가족 구성원 사이의 경계가 분명하다. 경계는 이기적인 것을 뜻하지 않는다. 가족 구성원이 각자의 역할을 먼저 잘 감당하는 가운데 다른 가족을 도울 수 있어야 한다. 역기능 가정은 자기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포기한 채 다른 가족의 필요만 돕는다. 아빠가 바쁜 경우 아들이 엄마의 정서적 배우자 역할을 감당하거나, 수치심이 있는 부모를 대신해 자녀가 부모 노릇을 하는 경우가 예다.


역기능 가족에는 항상 '희생자 역할'이 있다.


모빌 한쪽을 건들면 전체가 흔들리듯 가족 구성원 중 결함이 생길 경우 가족 전체가 흔들린다. 누군가는 가족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희생하게 된다. 희생자에 대해 '브래드 쇼'는 이렇게 말한다.

역기능 가족에서 두려움과 상처, 그리고 외로움이 어느 정도까지의 높은 수위에 도달하면 이를 배출해낼 가족 희생양을 구하게 된다. 그리고 이 희생자 역할을 맡는 건 언제나 가정에서 가장 연약하고 감정이 민감한 인물이기 쉽다. '존 브래드 쇼', <수치심의 치유>


'가장 연약하고 민감한 감정의 소유자가 나였구나.' 건강하지 않은 가족 역할을 맡은 사람은 자신의 페르소나가 곧 자신인 줄 알고 살아간다. 가면을 썼다는 사실도 모른 채 감정과 욕구를 철저히 포기하며 타인을 돌보며 살아간다. 이런 사람의 경우 부모를 떠나 사회생활, 결혼을 해도 의존적인 관계를 맺게 된다. 언제나 자신의 행복과 불행을 결정짓는 것은 내가 아니라 상대방이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결혼 후에도 희생자 역할을 이어가는 사람이 많다는 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수치심이 있는 사람은 수치심이 있는 사람과 결혼하게 된다고 한다. 주변을 둘러보면 자존감이 비슷한 사람끼리 만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아내와 결혼하면 잘 살겠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결혼생활을 해보니 내가 부모를 책임져야 한다는 잘못된 믿음이 아내에게도 적용됐다. 아내의 감정을 내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내가 먼저 지쳐서 아내를 원망하기도 했다. 내가 어머니에게 느꼈던 감정처럼. 내 가족만큼은 건강한 경계를 세우기로 했다. 희생자 역할은 이제 그만하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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