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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ok끄적쟁이 Sep 28. 2023

사다리와 민들레의 우화

씨줄과 날줄, 사유의 확장 28. 물고기 존재않음, 보이는 세상은 1부

씨줄과 날줄, 사유의 확장 28.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 1부

(연관성이 있는 2권 이상의 책을 엮어 사유의 폭을 확장하는 이야깃거리를 전달하고자 합니다.)

이 문서는 작품이나 인물 등에 대한 줄거리, 결말, 반전 요소 등의 스포일러를 직·간접적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출처: 마크 리부 사진전

  네모난 수염이 인상적인 시클그루버는 독일인 페인트공입니다. 마을 건물들의 높은 부분을 칠하기 위해 필요한 사다리를 찾아보던 중, 시장에 딱 적당한 물건이 있어 구입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다리는 좀 특이한 점이 있었습니다. 사다리의 제일 아래쪽 가로대는 길쭉한 갈치 모양을 하고 있었고, 그다음 가로대는 도롱뇽, 그 위는 뱀, 학, 기린 순서로 가로대가 꾸며져 있었습니다. 순서는 아래에서부터 어류-양서류-파충류-조류-포유류 순이었습니다. 시클그루버는 그 사다리가 매우 마음에 들었고, 그날부로 '사다리주의자'가 되었습니다. '사다리주의자'란 '생김새의 복잡성' 또는 '주변 생물을 도와주는 능력' 같은 것이 생물의 객관적 척도라고 믿고, 그 척도를 사용해 생물의 등급을 매기는 사람들입니다. 예를 들어 도롱뇽은 '자식들을 더 많이 보살피기' 때문에 물고기보다 더 높은 위치를 부여합니다. 반면, 빌붙고, 속이고, 더부살이하는 기생충은 '멀쩡한 생명체'로서의 마지노선도 통과하지 못하는 하등한 존재가 되는 거죠.

출처: 브런치 '공구로운 생활의 '사다리'

  시간이 흘러 마을에 고층 건물이 늘어났습니다. 시클그루버가 사다리를 이용해 올라가도 닿기 어려운 건물들이 생겼죠. 시클그루버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사다리를 더 높여야겠는걸'

'지금 제일 상층에 위치한 포유류보다 높은 곳에 올라갈만한 게 뭐가 있을까?, 사람 모양으로 하면 한 층밖에 높일 수 없을 테고...'

여러 궁리를 하던 시클그루버는 여러 인간들 중에 제일 나쁘다고 생각하는 흉악범의 얼굴을 다음 가로대로 만들었습니다. 그다음 가로대는 흉측하게 생긴 꼽추의 얼굴로 꾸몄습니다. 그다음은 지능이 떨어지는 바보, 그리고 간통한 여자, 제일 위쪽은 거지의 얼굴이었습니다. 새로 추가한 가로대 덕분에 시클그루버는 높은 건물도 거뜬히 페인트칠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기분이 좋았습니다.


  또다시 시간이 흘렀습니다. 마을에는 더 높은 건물들이 생겨났습니다. 그 건물들은 새로 만든 사다리로도 닿기 어려운 높이였습니다. 시클그루버는 다시 생각했습니다. '이번엔 누구 얼굴을 사용하지?' 

그때 그의 앞에 고리대금업을 하는 유대인 아론이 지나갔습니다. 아론의 모습을 본 시클그루버는 기분이 나빠졌습니다. 몇 달 전 페인트를 살 돈이 부족해 아론으로부터 돈을 빌렸는데, 너무 많은 이자를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을 가만히 앉아서 뜯어가는 아론이 못마땅했습니다. 

'그래, 다음은 저 녀석 얼굴로 하자.'  

아론을 시작으로 하나 둘 마음에 들지 않는 녀석들의 얼굴이 떠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커스도 싫었습니다. 지난밤에 산책을 하면서 마주쳤을 때 하얀 이와 눈만 보이는 게 어쩐지 소름 끼쳤습니다. 시커먼 그 얼굴 때문입니다. 장웨이도 싫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노려보는 듯한 음흉스러운 작은 눈. 엊그제 문 앞에 놔둔 페인트붓이 하나 없어졌는데 그놈 소행일지도 모릅니다. 마을에 왜 이리 나쁜 놈들이 많아졌는지 한탄스러워하며 사다리를 만들었습니다. 만들면 만들수록 '착하고 멋진' 독일인만 마을에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로 만든 사다리 덕분에 마을에서 가장 높은 탑까지도 색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시클그루버는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출처: 월간 '산'

  그러던 어느 날 미국인 촌장 그랜트가 씩씩거리는 아론, 마커스, 장웨이를 데리고 시클그루버를 찾아왔습니다. 아론, 마커스, 장웨이는 매일 같이 시클그루버의 구둣발에 밟히는 사다리에 자기들의 얼굴이 사용된 걸 알고선 무척 화가 났습니다. 그들은 '민들레주의자'였거든요. '민들레주의자'란 다양한 용도로 쓰이는 민들레처럼 자연에서 생물의 지위를 매기는 단 하나의 방법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나의 계층구조에 매달리는 것은 더 큰 그림을, 자연이 만들어낼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저버리는 일이기 때문에 '사다리주의'에 격렬히 반대합니다. 그들은 시클그루버에게 당장 자기들에게 사과하고 보는 앞에서 사다리를 부수라고 요구하였습니다. 그들의 주장이 일리 있다고 여긴 그랜트 촌장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시클그루버를 설득하였습니다. 하지만 사다리에 대한 애정이 너무 강했던 그는 차마 사다리를 부술 수 없어 그들의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결국 시클그루버는 사랑해 마지않는 사다리를 짊어진 채, 마을에서 쫓겨났습니다. 떠나는 그의 등에 업힌 사다리의 끝부분에는 이런 표식이 적혀있었습니다. 'Made in U.S.A.'

  비록 쫓겨났지만 옆동네 '독수리마을'로 살 곳을 옮긴 시클그루버는 행복했습니다. 그곳은 오직 '사다리주의자'인 독일인들만 사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것을 기념하여 이름도 바꾸었습니다. 그 이름은 'H'로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2부에서 계속)


오늘 읽은 책 한쪽이

내일의 나를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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