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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ok끄적쟁이 Sep 01. 2024

책에 빠지게 된 두 번의 변곡점

독서와 나의 인생이야기

대학 때까지 나에게 스스로 읽는 책이라는 건 만화책을 의미했다. 동네 만화방에서 순정만화 코너를 제외하곤 안 읽어 본 책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러다 책에 빠지게 된 첫 번째 계기는 군대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1년간의 직장 생활 후, 늦은 군입대를 하게 되었다. 조용한 ADHD 성향이 있어 일과를 마치면 멍하니 앉아있어야 하는 시간이 참 견디기 힘들더라. '뭘 해야 하나' 하고 고민하던 중 눈에 띄었던 것이 매주 목요일인가 방문했던 이동도서관 차량이었다. 일주일에 5권 정도를 빌려주었는데, 어차피 시간 때우는 거 책이 낫겠지 싶어 3권 정도를 빌렸다. 


군대를 다녀온 분들은 알겠지만 이등병이 쉬는 시간에 책을 읽으면 개갈굼당하기 딱 좋은 시절이었다.(요즘 군대상황은 모름) 그래서 그때부터 화장실과 친해졌다. 책 한 권을 오렌지색 활동복 안으로 숨겨서, 앉아서 보기 편한 양변기 칸으로 들어갔다. 선임들의 의심을 사지 않아야 했으므로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근데 이게 웬일? 제한된 시간, 일탈의 느낌 때문인지 책 읽는 시간이 너무 즐거웠다. 집중력도 최고조에 달했다. 아마 칙센트미하이가 말한 '몰입'의 시간이었던 것 같다. 


첫 경험이 너무 짜릿해서 그다음 주부터 매주 책을 5권씩 읽었다. 물론 활동복 안에 숨겨도 티가 안나는 얇은 책이긴 했지만 독서완 담을 쌓고 지내던 나로선 엄청난 일이었다. 내부반 안에서 당당히 읽을 수 있게 된 상병 시절부턴 5권이 모자랄 지경이라 두께를 조금씩 늘려갔다. 병장이 되고선 읽어선 안될 시공간에서 읽다가 '휴가 삭감'이란 징계까지 받았으니 가히 중독이라 할 만큼 책에 빠져있던 시절이었다. 


제대 후엔 여유 시간이 훨씬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군 시절만큼 읽진 못했지만 늘 책을 끼고 다니는 사람으로 변하긴 했다. 그런데 그렇게 수년을 살며 느끼게 된 건 책만 읽는다고 내 생활이 극적으로 달라지진 않는다는 거였다. 그러면서 '책태기'란 것이 찾아왔는데, 그걸 극복할 수 있었던 게 우연치 않게 발생한 하나의 사건 때문이었다.




뇌는 쓰면 쓸수록 발달하는 거랑 관계가 있는 건지 읽으면 읽을수록 독서 속도가 늘어났다. 얇은 경우는 2시간이 채 걸리지 않아 1권을 끝냈었고, 400쪽 내외의 일반적인 책도 5~6시간 정도면 충분했다. 이 때는 '많이 읽으면 인생이 바뀌겠지'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책의 권수에 집착하던 시기였다. 어느 정도였냐면 배구, 골프 등 새로운 운동을 시작하거나 심지어 여자 꼬시는 법도 책을 통해 배웠다. 


그런데 수백 권의 책을 읽으며 몇 년을 보냈지만 막상 인생의 극적인 변화는 찾아오지 않았다. 머릿속에 든 지식은 늘어났지만, 내 생활에 아니 더 솔직히 말하자면 그걸로 돈이 더 벌리고 그러지는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책 읽는 게 시들해지더라. 바쁜 직장 생활, 어린 아들 육아에 매진하다 보니 더 심해졌고, 남는 시간은 새로 배운 골프에 몰빵 하게 되었다. 연습장, 스크린 골프, 가끔 가는 라운딩... 자연스럽게 나는 책태기에 빠졌다. 


그렇게 수년이 흘렀고, 내 생활의 중심은 여전히 배구, 골프 등 스포츠였다. 아이가 자라며 여유가 생겼지만 그 시간 중 독서에 할애되는 시간은 여전히 적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직장 동료들과 야간 라운딩을 가게 되었다. 자세가 무너진 탓인지 스크린이든 필드든 최근의 스코어가 별로여서 나름 심기일전하고 티샷을 날렸다. 


"나이스 샷!" 

이었으면 좋았겠지만, 회심의 드라이버샷은 회심의 슬라이스가 걸렸고 가까스로 해저드행을 면해 카트 도로 옆에 걸렸다. 가장 먼저 세컨샷을 하는 동료의 공이 있는 지점에서 45도 방향으로 우측 앞 위치였다. 원래라면 동료의 샷을 마치고 앞으로 갔어야 하지만, 마침 그 위치에 카트가 있었고 표적이 되는 홀과도 동떨어진 위치라 채를 챙기기 위해 카트로 향했다. 


홀까지 100미터 안쪽이 남아 웨지를 챙기고 돌아서려는데 뭔가가 "퍽"하고 오른쪽 눈을 때렸다. 눈앞이 번쩍하는 순간 양손으로 오른 눈을 부여잡고 무릎을 꿇은 채 잔디 위로 쓰러졌다. 오히려 고통은 잠시 뒤에 찾아왔다. 그 순간 머릿속엔 온통 하나의 생각뿐이었다. 


'이제 난 어떻게 되는 거지?' 


아이러니하게도 눈을 다치고 나자, 한 켠에 밀어두었던 책이 다시 내 삶의 중심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퍽" 


충격과 함께 풍경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뭔가가 오른쪽 눈을 때렸다. 골프공이었다. 


2017년 11월 29일 17시경, 세상의 절반이 내게서 멀어져 갔다. 


몇십 분이 지나 조심스레 눈을 떴다. 오른편 세상은 붉은 렌즈 망원경으로 보는 느낌이었다. 온통 빨갰고 오십 원짜리 동전 크기마냥 시야가 좁아져 있었으며, 그마저도 흐릿했다. 응급실에서 여러 처치를 받고 올라온 입원실에서 의사 선생님의 말을 들었다. "눈에 차있는 피가 빠질 때까지 앉아서 잠을 자야 한다"고 했다. 그런 생활을 하루, 일주일 혹은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을 해야 될지도 몰랐다. 눈이 회복될 수 있다거나 영원히 이 상태로 있어야 하는지도 말해주지 않았다. 끔찍했다. 당황, 슬픔, 공포, 무력감, 분노로 머릿속이 가득했다. 그렇게 14일이 지나서야 예전처럼 누워서 잠을 청할 수 있었다. 


2주 정도 지난 후, 퇴원을 하게 되었다. 여전히 오른쪽 시야는 안개 낀 듯 흐리고 물체가 2개로 보였다. 단지 붉은색 배경만 원래대로 돌아왔을 뿐. 


멀쩡할 땐 하고 싶은 게 참 많았다. 그런데 당연한 걸 잃어버리고 나니 원하는 건 단 하나밖에 없었다. 


'원래대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극히 제한되고, 삶의 모든 면에서 타인에게 기대어 살아야 하는 시절이었다. 감정의 기복이 별로 없는 성격이었음에도 참 우울했다.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쳐다보며 지냈다. 눈을 다치니 눈으로 할 수 있는 활동이 더 하고 싶어 졌다. 책을 펼쳤다. 오른눈을 가리면 잘 보였다. 이전과 별차이 없었다. 왼눈을 가리자 글자가 분신술을 썼다. 1~2분 지났을 뿐인데 머리가 어지러웠다. 별 수없어 책을 다시 덮었다. 30분쯤 흐르니 책이 다시 읽고 싶어 졌다. 내가 독서를 이렇게 애정하는 줄 예전엔 미처 몰랐다. 


퇴원 후 1주일에 1~2회 정도 외래진료를 다녔다. 상태를 살펴보던 의사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있다. 


"골프공에 맞고 이 정도면 엄청나게 운이 좋은 겁니다." 


선생님 얘기가 맞다. 골프공에 정통으로 맞았으면 눈알이 터져도 이상할 게 없었다. 다행히 내가 맞은 공은 동반자가 '쌩크'를 낸 볼이었다. 빚 맞은 공이란 소리다. 공에 맞은 건 불운, 쌩크난 볼에 맞은 건 행운, 눈에 맞은 건 불운.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감사할 일이기도 하고, 억울할 일이기도 하다. 


시간이 지나 짝눈이란 상황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니, 우울감도 조금씩 사그라졌다. 그러자 상처 난 오른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에 익숙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보이는 왼쪽눈만 쓰다간 오른눈의 시력이 더 나빠질 것 같았다. 그날부터 하루 일정시간 동안 멀쩡한 왼쪽눈에 안대를 끼고 생활했다. 처음엔 5분, 다음날엔 10분, 이런 식으로 점차 시간을 늘려나갔다. 실내에 어느 정도 적응한 후에는 밖으로 나갔다. 매일매일 같은 간판을 보면서 얼마나 더 잘 보이는지 체크했다. 기분 탓일까. 날이 갈수록 글자가 또렷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럴수록 점차 활력이 생겨났다. 


0.4 

0.6 

0.8 

0.9 

1.0 


매번은 아니었지만 약 한 달 간격으로 시력도 차츰 회복되었다. 2개였던 물체도 다시 하나가 되어갔다. 물론 위기가 없었던 건 아니다. 의욕이 앞선 탓에 오른쪽 눈으로 생활하는 시간을 30분에서 1시간으로 급격히 늘린 게 화근이었다. 갑자기 시야가 빨대구멍 크기로 좁아지는 일이 벌어졌다. 순간적으로 벌어진 일이라 너무 놀랐다. 안대를 벗고 주저앉아 1분 정도 있으니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런 일이 며칠마다 한 번씩 반복되었다. 너무 무리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시간을 다시 30분으로 되돌렸다. 그리고 3~4일 간격으로 10분씩 늘렸더니 그런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약해진 오른눈에게도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사고 후 1년 뒤부터 지금까지 내 오른눈의 시력은 1.0이다. 사고 전 1.5였으니, 0.5 정도 시력저하가 발생한 셈이다.(내 소식을 듣고 애꾸가 될까 걱정했던 친구들이 이젠 공 맞은 놈이 자기들보다 눈이 좋다고 핀잔을 준다.) 조리개 역할을 하는 홍채가 공에 맞은 후 빛조절이 잘 안돼 눈부심 현상이 좀 있다. 그리고 평생 달고 살게 된 3가지가 있다. 보호안경, 빌베리(눈영양제), 인공눈물. 


맞다. 이전 삶에 비하면 많이 불편하다. 1년마다 받아야 하는 안과검진까지 포함하면 경제적 부담도 크다. 하지만 그 대신 얻은 것들이 있다. 건강한 생활습관이다. 우선 눈 핑계로 술을 끊었다. 코로나 전만 해도 회식도 잦고 술을 안 먹기가 힘든 분위기였는데, 부상 이후 나는 당당하게(?) 술을 거부할 수 있게 되었다. 술이 비워진 시간엔 운동과 독서가 자리 잡았다. 다시 책을 편안하게 볼 수 있게 된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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