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인류의 종말은 사이버로부터 온다'를 읽고 2부
우크라이나는 지난 10년, 세계에서 가장 거친 사이버전쟁의 실전무대였다. 러시아 해커들은 5년 넘게 하루 수천 건의 공격을 퍼부었다. 허술한 비밀번호, 불법복제 소프트웨어, 성급한 방화벽 설정 같은 작은 균열을 찾아 끊임없이 비틀었다. 선거관리시스템에 침투해 극우 후보가 당선된 것처럼 조작하려 했고, 헌법기념일에 맞춰 국가 전체를 마비시키는 메시지를 던졌다. IT만 표적이 아니었다. 겨울에 전력과 난방을 끊는 것만큼 국민의 신뢰를 붕괴시키는 전술도 드물다. 사이버 공방은 물리적 침공의 예고편이었다.
중국은 다른 방식으로 ‘실험’을 진행했다. 신장은 최신 감시 기술의 인큐베이터가 됐다. 더 강력한 툴은 먼저 자국민에게 쓰인다. 가장 두려운 대상이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부의 국민’이기 때문이다. 얼굴·음성·휴대폰·메신저·위치가 묶인 총체적 감시가 현실이 되었고, 제로클릭 스파이웨어는 클릭조차 필요 없는 투명한 족쇄가 됐다. 이 실험이 성숙해질수록, 그다음 질문은 “언제 해외 표적에 쓸 것인가”로 바뀐다.
그리고 한반도. 북한의 라자루스는 워너크라이로 병원과 공장을 멈춰 세웠고, 같은 툴셋으로 은행을 털어 외화와 코인을 빨아들였다. 진입비용은 낮고, 익명성은 높고, 수익성은 탁월한—북한에 최적화된 비대칭 무기다. 러시아가 실전 전술을 검증하고, 중국이 감시 기술을 숙성시키는 사이, 북한은 사이버를 수익모델과 제재 회피 수단으로 삼아 정교하게 키웠다. 더 무서운 사실은 이들 셋 모두가 미국·동맹의 유출 툴과 상용 제로데이 시장을 흡수하며 역량을 끌어올렸다는 점이다. 한번 상자에서 꺼낸 무기는 다시 넣을 수 없다.
대한민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초연결 사회다. 전력·철도·상하수도·물류·의료·교육·국방 조달·전자정부·모바일 뱅킹·가상자산 거래소까지, 생활 전반이 네트워크에 얹혀 있다. 이 말은 곧, 공격자가 '자기 방식대로' 노릴 표적이 넘친다는 뜻이기도 하다. 선거는 이미 디지털 전쟁의 1순위 목표다. 투표 집계기를 해킹하지 않아도, 유권자 등록·개표 백엔드·지자체 전산·지역 전력시설 같은 주변부를 건드리면 혼란은 충분하다. 민주주의의 심장부는 ‘정확한 결과’만이 아니라 ‘결과에 대한 신뢰’인데, 사이버 전술의 핵심 목표가 바로 그 신뢰를 갉아먹는 데 있다.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전장은 심리다. 러시아의 정보전 교과서는 현안 속에 허위를 섞어 주의를 분산시키고, 분열을 극대화하라고 가르친다. 백신·감염병·안보·젠더·이념—이미 갈라진 틈에 맞춤형 콘텐츠가 떨어진다. 우리는 링크를 누르고, 분노하고, 공유한다. 공격자는 굳이 전력망을 끄지 않아도, 우리 스스로 스위치를 내리게 만든다.
우크라이나는 우리에게 물었다. 더 연결된 사회일수록, 더 과감히 끊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신장은 경고했다. 감시의 실험은 항상 내부에서 시작한다. 북한은 증명했다. 싸고 빠른 사이버는 강대국의 빈틈을 파고든다. 한국의 선택은 명료하다. 초연결의 효율을 누리되, ‘오프 스위치’를 항시 기억하는 나라. 스마트 시티가 진짜 스마트해지는 길은 더 많은 센서가 아니라, 더 적은 자만과 더 많은 겸손이다. 연결이 만든 번영의 그늘을 직시할 때, 비로소 우리는 연결의 미래를 지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