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오래전 일이라 내 기억이 왜곡됐을 수도 있지만, 나는 중학교 때까지 공부에 진심인 학생이었다. 원하는 점수를 얻기 위해 새벽까지, 또는 새벽에 일어나 교과서를 달달 외웠고, 시험 기간에는 애써 집어넣은 지식이 빠져나갈까 봐 머리를 감지 않았다. 다행히 결과도 잘 나왔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들어가자 사정이 달라졌다. 점점 등수가 밀려난 건 물론, 수포자가 되어 수업 시간 내내 엎드려 있었다. 어렵기는 과학도 마찬가지. 결국 엄마는 유명하다는 학원에 나를 밀어 넣었고, 답이 틀릴 때마다 '사랑의 매'로 손바닥을 때리는 선생님 밑에서 울며불며 문제를 풀었다. 이러한 기억 때문인지 나는 '공부'하면 국영수부터 떠오르고 저절로 한숨이 나온다.
그래서 <최재천의 공부>라는 제목을 봤을 때도 어떻게 하면 입시에서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는지 방도를 알려주는 책이라고 생각했다. 교수님의 하버드 입성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을 거라고 짐작한 것이다. 그런데 전주를 읽자마자 먹구름 사이로 서광이 비치듯 환희에 가까운 감정이 일었다.
우리 모두 이 순간부터 우리 아이들을 입시 학원에 보내지 맙시다. 우리 모두 이 순간부터 우리 아이들에게 삶을 즐길 권리를 되찾아 줍시다. 우리 모두 이 순간부터 정상적인 가족생활을 누립시다.
교수님은 한숨 나오는 입시에 숟가락을 얹는 게 아니라, 답답한 교육 현실을 바꿀 ‘진짜 공부’에 대해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 있었다. 세계 유명 대학을 두루 살핀 교수님의 성찰과 독자를 대신해 더 깊이, 더 넓게 교육에 대해 파고드는 안희경 저널리스트의 대화는 읽으면 읽을수록 탄산 가득한 사이다 같아 속이 시원해졌다.
그중에서 '동물스러운 교육'을 하면 좋겠다고 말한 부분이 크게 와닿았다. 동물 세계에서는 선생님이 적극적으로 가르치지 않고 그냥 거기 있을 뿐, 아이들이 보고 배운다고는 것이었다. 그 예로 침팬지들이 견과류 깨 먹는 방법을 이야기했는데, 받침돌이 평평해야 열매가 굴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새끼 침팬지가 스스로 익힐 때까지 엄마는 도와주지 않는다고 한다. 왜 평평한 돌이 필요한지 혼자서 배우게 두는 것이라고. 그에 반해 우리는 아이를 가르치려고 덤벼드는 것 같다고 했다.
사실 아이의 엉성함을 지켜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같은 실수를 여러 번 반복하는 모습은 잔소리를 부르고 급기야 ‘대신해주고 말지’라는 생각까지 들게 한다. 스스로 익히는 게 좋다는 건 알지만,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는 여유 부릴 시간을 주지 않는다. 우리 아이만 뒤처지는 것 같다는 불안을 낳게 해 조금 더 나은 조건에서 출발할 수 있도록 국영수를 부르짖는다. 기대와 불안. 이 두 가지가 자꾸만 아이를 닦달하게 만든다.
이러한 현실에 대해 교수님은 확실한 답은 없지만, 얄궂은 시험 문제로 아이들을 고생시키는 교육은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다. 앞만 보고 모두가 달려가는 교육 대신 자연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살아남을까를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 자연과 가까워지면 행복할 수 있는 걸까. 이에 교수님은 직선과 점으로 연결된 공간에서 학습하는 것보다 다양한 공간을 접하는 아이의 지적 능력은 분명히 다를 거라며 생태적 환경의 중요성이 국영수에 밀리지 않도록 대학의 다양화가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하버드대학교가 ‘다양성’을 고려해 학생들을 뽑는데, 이는 서로 다른 분야의 거름이 될 수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끼리끼리’라는 말처럼, 우리는 나와 다른 사람에게 낯설고 어색한 감정을 느낀다. 하지만 그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각자가 지닌 개성을 존중한다면 경쟁과 서열 중심의 사회에도 숨구멍이 트일 것이다. 그런 다양성이야말로 모두가 똑같은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일을 멈출 수 있게 해주지 않을까. 그 과정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악착같이 찾아 나간다면 언젠가 이거다, 싶은 길을 만나 행복하고 즐겁게 살 수 있을 거다.
모두가 우러러볼 정도의 능력을 갖춘 교수님은 말미에 시인 게리 스타이터의 말을 빌어 ‘자연계는 총체적인 교육’이라며 스스로 조절하고 상호작용하며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간의 마음도 자연의 일부이니 자연의 마음을 경험하자고.
나는 이 말의 진의를 자신과 주변의 다양성을 받아들이고,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교육이라고 풀이하고 싶다. 그 과정에서 자연과의 교감을 놓치지 않는다면 삶은 더 풍요롭고 진득해질 거라고. 그렇게 된다면 하루하루가 공부요, 일상이 배움이지 않을까.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느라 놓치고 살아온 것은 무엇인지 돌아보며 나를 찾는 연습을 해나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