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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작 Oct 13. 2023

주술 같은 책

_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읽고

내 나이 마흔하나. 유혹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뚝심도 있고, 주변을 챙길 줄 아는 여유도 생겼다. 하지만 나에게만큼은 관대하지 못하다. 더 잘하고 싶다는 생각에 스스로 채찍질할 때가 많다. 아직은 소파보다 책상 앞에 앉는 게 마음 편하고 무엇이라도 읽고 써야 살아있다고 느낀다.


그렇게라도 지적 욕구를 채우고 나면 온몸이 짜릿해지지만, 그것을 소화시켜 밖으로 내놓아야 할 때는 두려움이 앞선다. 그래서 화면 속 깜빡이는 커서는 나를 작아지게 하고, 조바심을 일으킨다. 써도 써도 어려운 글쓰기가 종종 발목을 잡는다.


지난겨울, 나는 원고 마감과 무리하게 잡아놓은 수업 일정으로 혹독한 시간을 보냈다. 하루하루 시간에 쫓겨 허덕이는 내 모습이 몹시 싫어질 즈음, 슬로 리딩으로 <명상록>을 만났다.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전쟁터에서 쓴 짤막한 일기였다.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널리 읽히고 있다는 사실이 신비로워 저절로 경건한 마음이 들었다. 책장을 펼쳐 한 줄 한 줄 읽어나가자 죽음을 가까이에 두고 있으면서도 담담하게 신념을 적어 나가는 그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첫 장부터 비장하면서도 엄중함이 느껴졌다. 삶을 대하는 자세에 흐트러짐이 없어 보였다. 어떻게 전쟁터에서 이토록 반듯하게 자신을 가다듬을 수 있는지 말문이 막혔다. 컴퓨터 앞에 앉아 발을 동동 구르던 내 모습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나왔다.      


네게는 다른 많은 좋은 자질들과 재능들이 있기 때문에 “나는 가지고 태어난 게 없어”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다.

화살이 날아가는 것과 인간의 정신이 나아가는 것은 서로 다르다. 화살은 늘 일직선으로 날아가는 반면 인간의 정신은 어떤 때에는 순조롭게 앞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어떤 의문이 생겨서 거기에 매달려 제자리에서 빙빙 도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늘 자신의 목표를 향하여 곧장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자리에서 빙빙 도는 것처럼 보이지만 곧장 나아가는 것이라는 부분이 묵직하게 다가왔다. 읽어나갈수록 전쟁터에서 쓴 황제의 일기가 지금 내 마음을 다독인다는 사실이 무척 흥미로웠다. 권력의 유무와 관계없이 삶에서 추구해야 할 가치는 불변하며 내면의 힘을 믿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내가 불안했던 이유는 나를 믿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그의 말처럼 내 안에 좋은 자질들과 재능들이 있다고 생각하자 몸에 힘이 들어갔다. 오랫동안 나를 혼란스럽게 했던 고민이 마르쿠스의 몇 마디로 정리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의 언어들이 주술처럼 여겨졌다.     


너무나 화가 나거나 도저히 참을 수 없거든 인생은 순간이고, 머지않아 우리 모두가 땅에 묻히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라
   

<명상록>을 읽기 전과 읽은 후, 가장 큰 변화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죽음을 가깝게 느끼게 되었다고 답하고 싶다. 마르쿠스가 처한 상황 때문인지 그는 죽음에 처연했고, 감정에 휘둘리지 않았으며 선의를 강조했다. 사태를 순순히 받아들였고 인생을 하나의 무대라고 생각했다. ‘죽음밖에 더 남겠느냐’는 말도 자주 했다.


그의 일기를 읽고 나니, 나를 지탱해 주는 가족들에게 조금 더 애틋해졌다. 마음을 표현하지 못했던 순간들이 떠올랐고, 내일이 마지막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 살아가고 싶어졌다. 훗날 누군가에게 위로가 될, 아니 우리 아이들에게라도 남기고 싶은 짤막한 글을 적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 같았다.


이런 마음으로 다시 <명상록>을 펼쳐 제1권을 보자, 그가 신의 은총이라며 가까운 이들에게 존경을 표한 부분이 다르게 다가왔다.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많은 것들이 얼마나 굉장한 것인지 다시금 깨달으며, 힘든 순간 마르쿠스를 만나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등바등하지 말고 조금은 느긋하게, 내가 선 무대를 즐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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