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모스>를 읽어야 할 이유는 차고 넘쳤다. ‘역사상 가장 많이 읽힌 과학 교양서’라는 띠지의 문구처럼 주위에는 이미 이 책을 추천하는 이들이 많았고, 한 유튜브 채널에 출연한 건축가는 <코스모스>는 서문만 읽어도 좋을 책이라며 일독을 권했다. 게다가 다큐멘터리 영상에서 본 저자 칼 세이건의 해박함과 수려한 말솜씨는 <코스모스>의 소장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던 차에 슬로리딩 모임에서 이제 <코스모스>를 읽어 보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수포자이자 과포자였던 나의 과거가 잠시 발목을 잡기도 했지만, 지금이 아니면 이 벽돌책을 읽을 기회가 없어 보였다. 그렇게 코스모스를 향한 삼 개월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걱정과 기대를 동시에 안고 <코스모스>의 머리말을 읽어내려갈 때였다. ‘과학을 이해하느냐 못하느냐가 우리의 생존 여부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할 것’이라는 문장을 보는 순간, 나는 마치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듯 칼 세이건의 세계에 흡수되었다. 그는 과학의 위력이 무엇인지 섬세하게 짚어내며 인류의 미래가 코스모스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했다. 확신에 찬 문장을 읽자 구원자의가르침을 얻으려는 사람처럼 이 책을 대하는 내 자세가 달라졌다. 신성한 교리를 대하듯 경건한 마음이 앞섰다.
고대 이오니아인들에 따르면 코스모스는 우주의 질서를 뜻했다. 칼 세이건은 우리가 사는 세상 역시 어떠한 변화에 패턴이나 규칙이 있다며 그렇기에 과학이 가능하고, 과학이 밝혀낸 지식으로 우리 삶을 발전시킬 수 있다고 했다. 이는 곧 우주의 질서를 이해하는 일이기도 하므로 인류의 미래는 코스모스를 잘 이해하는가에 크게 좌우될 것이라고 했다. 이 세상에 보이지 않는 질서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과학이 전과 다르게 보였는데, 저자는 그와 관련된 자료를 하나하나 펼쳐 보이며 내가 코스모스에 맹신하도록 이끌었다.
에라토스테네스의 이야기가 그 대표적인 예다. 그는 천문학, 수학, 역사학, 지리학, 철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함과 동시에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책임자였다. 그리고 기원전 3세기에 막대의 그림자로 지구의 크기를 측정한 대단한 인물이기도 하다. 에라토스테네스의 학문에 대한 열정과 실험 정신도 훌륭하지만, 쉽게 지나칠 관측 보고로 한 행성의 크기를 알아낼 수 있을 만큼 세상이 과학적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은 정말이지 신선한 충격이었다. 지구 너머는 생각보다 질서 정연했다.
요하네스 케플러가 암울한 시간을 견뎌내고 마침내 세 가지의 법칙을 밝혀낸 점도 인상적이었다. 케플러는 행성이 타원 궤도를 따라 움직이고, 행성과 태양 사이의 평균 거리는 행성 주기와 비례한다는 점 등을 알아냈는데, 이러한 연구 덕분에 우리가 비로소 우주로 나아가는 이정표를 얻었다고 했다. 우주의 질서와 시대를 잇는 구심점이 바로 과학이라는 걸 새삼 깨닫자 과거 현인들의 숭고한 노력에 감탄하게 되는 건 물론, 코스모스에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간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 우주, 천체, 행성은 내가 호기심을 느끼지 못했던 분야라 우주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어야 하는 이유를 뚜렷이 알지 못했다. 하지만 우주를 떼놓고 지구를 말할 수는 없었다.
이밖에도 칼 세이건은 과학, 수학은 여타의 문명과 공유할 수 있는 공통의 언어라고 소개하며 자연의 법칙은 우주 어디를 가든 동일하다고 했다. 그러니 외계 생명을 탐색하는 연구에 몰두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사실 외계인의 존재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었으나 우리가 사는 지구라는 행성이 우주에서 바라보면 ‘쥐면 부서질 것만 같은 창백한 푸른 점’ 일뿐이라는 걸 알고 나자, 인류는 우물 안에 갇힌 미약한 존재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야를 더 넓혀 나가는 것은 단지 새로운 생명체를 찾거나 지구의 대체 행성을 찾기 위한 여정이 아니라, 우주의 질서를 찾아 과학적인 발견을 이룩하기 위함이라는 걸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칼 세이건의 지식에 푹 빠져 지낸 시간도 있지만, 사실 아무리 봐도 이해하지 못할 것 같은 과학적 이론과 공식에 머리를 감싸 쥔 적도 있다. 그래서 과학, 수학, 양자 역학에 관심을 가져야겠다고 다짐한 날이 있는가 하면, 역시 나는 이과 계열은 안 맞는다며 다시는 이런 책을 집어 들지 않겠다고 자괴감을 느낀 적도 있었다. 따지고 보면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았으니, 이 책의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 속이 시원했어야 했다. 그런데 마침내 다 읽었다는 환희를 경험하기도 전에, 당황스럽게도 다시 한번 읽고 싶다는 욕구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보니, 어려웠지만 새로워서였다. 잘 알지 못했던 분야를 탐독하면서 앎의 즐거움을 느꼈고, 그 부분을 영상으로 다시 한번 찾아보며 지식의 확장이 가져온 희열을 느낀 덕분이었다. 에라토스테네스, 케플러뿐 아니라 상형 문자를 해독한 장 프랑수아 샹폴라옹, 비운의 여성 수학자 히파티아 등 역사적 인물의 이야기가 특히 그랬다. 또한 한 사람의 생애로는 알아내기 부족한 우주의 진리를 과학적 이론과 공식으로, 먼 후손들에게도 전할 수 있게 진실한 문장으로 밝혀준 점이 뜨겁게 와닿았다.
칼 세이건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갖기 쉬운 편협한 시각을 넓고 다양하게 만들어주었고, 내가 아닌 존재를 그윽하게 바라볼 수 있는 심지를 가슴에 꽂아주었다. ‘나’에 대해서는 의심을 하지 않으면서 나와 다르면 기괴하게 느끼는 우리의 면모를 돌아보게 했다. ‘이방’이나 ‘외계’라는 부정적 뉘앙스를 가진 표현을 아무렇지 않게 써왔다는 사실이 그러했다. 그래서 배우고자 하는 자세로 마음 한편에 코스모스를 담아간다면 세상을 과학적으로 이해하는 건 물론 수학, 인물, 생태 등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 책은 한번 읽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게 맞다. 다시 읽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