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결국, 휴직을 선택했다.

모든 것이 다 처음이었다.

육아휴직을 결심한 뒤, 나는 내 시간을 처음으로 돌아보게 됐다.

회사에서의 나, 집에서의 나, 그리고 그 사이에서 무너져가던 나를.



1. 너무 이른 시작

나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결혼했고, 아이도 빨리 낳았다.
요즘 기준으로 보면 꽤 빠른 선택이었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 나는 회사 신입이었다.

회사에서는 ‘막내’였고
집에서는 ‘아빠’였다.

두 세계 모두 처음이었다.


2. 신입사원의 자리

내가 다니는 곳은 지방공기업이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안정적인 직장’.

하지만 내가 들어간 직렬은 꽤 수직적이었다.

신입이 맡는 일은 다양했다.
보고서 정리, 자료 준비, 심부름, 그리고 식당 예약.

점심시간에 20명이 들어갈 식당을 부산 중심지에서 잡는 일.
해본 사람은 안다.
그게 얼마나 까다로운 일인지.

몇 군데를 돌려가며 예약해도 문제는 생긴다.


고기를 좋아하는 사람, 채식을 고집하는 사람,
같은 식당은 싫다는 사람.

고깃집을 잡으면
“왜 채소가 없냐”고 하고,

채식 위주 식당을 잡으면
“내가 토끼냐”고 농담 아닌 농담을 던진다.

거기에 “여긴 맛이 없다”는 평가까지 따라온다.

그건 내 본업도 아니었다.
하지만 결국 내 책임이 되었다.


퇴근은 6시였지만
7시에 회의 보고를 하는 날도 많았다.
초과수당은 당연하다는 듯 사라졌다.

보고할 때는 90도로 인사하고,
수정 지시를 받으면 다시 출력해서 가져가는 게 기본이었다.

수백 페이지 종이를 낭비했다.

예산과 자료를 맞추다 보면
밤 12시에 퇴근하는 날도 적지 않았다.

사람들은 말한다.
“그래도 공기업이잖아.”

그 말이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


3. 아빠라는 자리

회사를 나와 집에 돌아오면
또 다른 근무가 시작됐다.

나는 아기가 그렇게 자주 우는지 몰랐다.

40분 자고 깨고,
울고,
분유 먹이고,
트림시키고,
재우고,
젖병을 씻고 말리고 돌아서면
다시 울었다.


첫 한달은 장모님이 많이 도와주셨다.
하지만 그 도움도 영원할 수는 없었다.

결국 나와 아내가 전담하게 됐다.

회사에서 지친 몸으로 돌아와
새벽까지 아이 곁에 앉아 있으면
어느 순간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누군가는 말한다.

“그건 아내가 더 많이 해야 하는 일 아닌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이를 낳았다고 해서
육아가 한 사람의 몫이 되지는 않는다.

아내의 아이가 아니라
우리의 아이니까.


4. 무너지지 않기 위해

그 시기, 나는 아내의 표정을 자주 살폈다.
산후우울증에 대한 기사를 본 뒤였다.

겉으로는 괜찮아 보였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아내도 많이 지쳐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갈등.

고부갈등.

내 부모님과 아내 사이에서
처음엔 ‘중립’을 지키려 했다.

어머니에게는 아내를 이해해 달라 했고,
아내에게는 어머니를 이해해 달라 했다.

하지만 그건 중립이 아니었다.
책임을 미루는 방식에 가까웠다.


결국 나는 선택했다.
아내 편에 서기로.

어머니와 통화하며 말했던 기억이 난다.

“가화만사성이라면서요.
집이 평화로워야 다 잘된다면서요.
지금 우리 집은 전혀 아닙니다.”

그 뒤로 연락을 끊다시피 했다.

한 번은 예고도 없이 집에 찾아와
장모님께 아내의 흉을 본 일도 있었다.

그때 나는 알았다.
누군가를 모두 만족시키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지켜야 할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는 걸.


5. 그리고, 나

이 모든 일이 겹치면서
나는 점점 예민해졌다.

아이에게도,
아내에게도.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러다가는
회사도, 가족도
전부 놓치겠구나.

나는 늘 적당히 버티는 사람이었다.


적당히 노력하고, 적당히 만족하며 살아온 사람.

그런데 이번만큼은
적당히가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심했다.


가족을
우선순위 1번에 두기로.

그리고 회사에
육아휴직을 신청했다.

그 선택이
내 인생의 방향을 바꾸게 될 줄은
그때는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