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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향기마을 Jan 16. 2023

무작정 여행의 순수한 기쁨

생존가방만 있다면

어린 북아티스트들과 책 작업하는 과정은 그야말로 무작정 여행이다.


또한 세상에 없는 이야기를 찾아 나서는 탐험이며 새로운 상상의 지평에 조금 더 멀리 나아가 자신만의 길을 내는 창조의 시간이다.


그 특별한 여정에는 특별한 생존가방이 필요하다.








지난 20년간의 북아트 수업은 거의 오프라인에서 진행되었다.

코로나 이후 나는 온라인 수업으로 전환하기 위해 애쓴 결과, 지금은 온라인 수업의 장점을 혜택으로 누리며 새로운 방식으로 자리 잡아 나가고 있다.


그중 가장 마음에 드는 점은 가정에서 자녀들의 책 만드는 과정을 지켜보는 부모들의 행복한 반응이다.


오프라인 수업에서는 부모들이 아이들만 맡기고 결과물만 받아보기에 그 과정에 대해서는 사실 잘 알기 어렵다. 세세히 아는 것을 번거로워하거나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하고 생각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아이들과의 찐한 대화는 모두 이 무심히 지나가는 과정에서 나온다.

특히 상상하며 이야기를 한 줄 한 줄 만들어 가는 수업에서는 말할 필요도 없다.


온라인 수업을 진행하며 옆에서 전 과정을 지켜보는 부모들은 아이들과 나와의 관계에 대해 정말 재밌다고 말한다. 나 역시 그렇다. 그리고 아이들이 스스로 북아티스트의 모자를 쓰고 자신의 이야기를 써 나가는 과정을 흥미롭게 바라본다.  


아이들은 상상하는 즐거움, 부모들은 지켜보는 즐거움으로 다음 북아트 시간을 기다린다.


바로 생존가방에 담길 첫 번째 준비물은 즐겁게 과정을 지켜보기이다. 








 권의 스토리 팝업북을 만들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작업 순서가 있다.


먼저 연습지로 책 모형을 만들고 팝업을 집어넣어 그에 맞는 이야기를 떠올린다.

그리고 팝업을 활용해서 그림을 그리는 동안 떠올린 이야기를 정리한다.

정리한 이야기를 쓴다.

그리고 완성지를 접어 글과 그림을 옮긴다.

표지를 완성한다.


이렇게 하면 매우 간단해 보이지만 사실 사이사이 수많은 변수가 존재한다.


처음 생각한 연습지 그림으로 글을 쓰다 보면 예상보다 길어져 계획한 완성지에 다 담을 수 없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오프라인에서 수업할 때 이런 일이 일어나면 현장에서 바로 조치를 취할 수 있지만, 온라인 수업에서는 부모들이 대처할 수 있도록 영상이나 줌 수업에서 알려주어야 한다.


처음엔 2쪽 책을 계획했지만 쓰다 보니 이야기가 길어졌고 심지어 재밌다.

6쪽으로 늘려 그림과 팝업도 더 그려 넣고 하면 근사한 책이 될 것 같다.

하지만 그러면 작업 시간도 더 길어지고 늘어난 페이지로 인해 부담을 느낄 수 있다.


머리를 싸매며 작은 손으로 쓴 글을 읽어보면 얼마나 신경 써가며 썼는지 눈이 시리게 감동이다.

그러니 어떻게든 그 글을 살려 책에 담을 수 있도록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니까 어린 아티스트들이 지금까지 애써서 작업한 과정을 살리면서, 가장 효율적이고 미적으로 손색없는 책 형태를 다시 구상한 후 즐거운 상태에서 마무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물론 아이들의 나이와 역량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항상 그들의 의사를 물어보고 원하는 것에 대한 과정을 상세히 설명해 준다.

어른들의 욕심으로 보면 좀 더 부추겨서 자랑할 만한 결과물을 내고 싶겠지만 나는 여기서 그 욕심을 과감히 저버린다.  


바로 생존가방 반드시 챙겨야 할 두 번째는 모든 과정에서 욕심을 버리고 어린 아티스트들의 의사를 존중하며 서로의 의견을 나누는 태도이다.








오프라인이든 온라인이든 성격이 급한 아이들은 작업의 순서를 뒤바꿔서 진행하다가 마무리가 안 되는 경우가 있다.


가령 연습지 과정에서 글과 그림이 정리가 되어야 하는데 대충 끄적이다가 완성지 표지부터 한다던가, 아니면 글을 완성지에 옮기면서 수정하기도 하고 그림을 싸인펜으로 바로 그려버리는 등 10명 중 5명은 순서에 신경 쓰지 않고 하고 싶은 것부터 하는 식이다.


이럴 경우 계획한 대로 책이 나오기 어렵고 시간 안에 완성할 수 없다.

또한 결과물도 어른들이 상상하는 작품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하지만 이것을 바로 잡으려 잔소리를 하기 시작하면 그걸로 아이들과의 관계는 고사하고 책 작업자체가 싫어진다.


그 흔한 잔소리는 이미 집에서도 다른 곳에서도 많이 듣는 것이라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그래서 너그럽게 실패할 기회를 준다.


자신의 고집이든 반항이든 아니면 느린 이해의 걸음이든, 작업의 순서보다 더 중요한 실패할 경험을 선사한다. 그리고 그 결과물을 보며 나와 함께 좋은 점과 아쉬운 점에 대해 서로의 의견을 나눈다.


생존 가방의 마지막 준비물은 실패할 경험을 선택할 자유이다.








한 권의 책을 만드는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과물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과정에서 느끼는 즐거움과 행복, 성취감과 자존감등을 실컷 누려보는 것이다.


어떤 아이들이든 특히 북아티스트의 자리에서 대화를 나눌 때는 파트너로서 존중받고 의견을 주고받으며 마음대로 실패할 경험을 선택할 수 있다.


내가 20년을 가르쳤다고 한들 오늘 만난 아이들은 전혀 새롭고 다르며 특별한 여행을 떠날 것이기에, 나의 경험과 노하우는 그들의 여정에 깔아 줄 돌다리 정도일 것이다.


한참 상상하다가 엉뚱한 곳으로 빠져 이야기가 엉켜 버리면 슬쩍 다가가서 해결할 방법을 함께 고민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면 답을 들이밀지 않아도 스스로 실마리를 풀어가는 창조자의 손끝을 볼 수 있다.


그 손 끝에서 어른들은 상상도 못 할 재미와 감동이 넘치는 이야기들이 쏟아진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어린 북아티스트들의 가슴에 깊이 남아 빛나는 자부심이 된다.


그 아름다운 여정을 이제껏 나 홀로 누려왔다면 온라인 수업으로 인해 그들의 부모들과 함께 공유하게 된 것이다.

나는 이 점이 참으로 기쁘고 만족스럽다.


부모들이 어린 아티스트들과의 특별한 여행에 필요한 생존 가방을 스스로 잘 챙길 수 있으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틀림없이 서로의 신뢰가 쌓여 흐르는 공감의 강에서 바다로 펄럭이는 돛을 펴고 마음껏 노를 저어가며 행복할 테니까.


그러면 나는 아직 한 번도 상상 이야기 여행을 떠나보지 않은 다른 별의 아이들을 만나러 가겠지.


내가 하는 일을 직업으로 분류하면 선생님이겠지만 나는 언제나 아이들 상상의 세계를 사랑하는 파수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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