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편지
통신사인 SKT에서는 약 10년 전쯤 '100년의 편지'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2014년 9월 17일부터 2014년 12월 31일까지 접수를 받은 이 프로젝트는 고객이 최소 1개월 ~ 최대 30년 사이에 마음을 전하고 싶은 편지를 적어 보내면, 해당 날짜에 맞추어 배달을 해준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나도 잊고 있었다. 2024년 12월 28일에 편지를 받기 전까진.
2014년에 나는 중학교 생활을 마무리하며 과학고 진학을 준비하던 시기였다. 합격자 발표는 이미 났지만, 졸업 전까지 예비 입학생들을 대상으로 교육 프로그램을 몇 주간 진행했는데, 얼마 안 남은 중학교 친구들과의 시간을 그렇게 빼앗기는 게 못내 아쉬웠다.
대한민국 입시에 있어서 전환기라고 할 수 있는 고등학교 입학은 우리 모두에게 큰 설렘이자 두려움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시기를 훨씬 지난, 어른이 된 나의 모습이 궁금했다.
중학생답게 다소 유치하고 다소 우습고 다소 귀여운 편지는 아래와 같이 전달되었다.
(* 개인 정보에 대한 부분은 일부 생략 및 기호 처리를 하였으며, 틀린 맞춤법이나 오타도 본문 그대로 차용했다.)
- 작성일 : 2014년 12월 28일
- 수취일 : 2024년 12월 28일
미래의 자라에게♡
안녕, 자라야? ^_^ 네가 이 편지를 받을 때 쯤이면 난 26살을 마무리하고 있을거야.
대학은 졸업 했을 거 같고, 대학원 다니고 있으려나? 지금의 난 과학고 입학할 준비를 하느라 한창이야. 뭐, 사실 별로 안바빠ㅋㅋ
고등학교 가면 무슨 일들이 있을까 많이 기대돼. 너에겐 이미 지나간 추억?일 뿐이겠지만. 선배들 연구하는 모습을 보니까 우와, 나도 저런 걸 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도 들고, 사실 지금까지 너무 안이한 생각으로 편한 길로만 가려고 했던 것 같아. 앞으로는 도서관 다니면서 책도 많이 읽고 공부도 좀 하려고..
사실 2학년 때 조기졸업하고 싶은 욕심도 있어. 근데 (조기졸업) 비율이 40% (로 줄어들었)다 보니까 좀 더 열심히 해야겠지?
(동네에서) 같이 학교에 간 친구 000 이랑은 잘 지내니? 티격태격하긴 해도 아는 애가 있어서 오히려 다행인 면도 있는 것 같아. 물론 걔 성격은 별로지만..
고등학교 졸업 하고는 어느 대학에서 뭘 하고 있을까? 아직도 천문학 하고 있니?ㅋㅋ 언제부터 좋아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이게 나의 운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어떻게 될 진 모르겠지만 이단 한 번 해보려고. 00대 00학과나 00대 00학과에 갔으면 좋겠다!!
물론 공부 짱 잘하는 친구들이 많으이까 원래 시험공부 하던거 처럼 설렁설렁하면 안되겠지..;;
저번에 학교에서 보니까 올림피아드에서 금메달 따고 연구도 잘 하던 선배도 있던데.. 나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음, 친구들이랑은 잘 연락하면서 지냈지? 사실 (기숙사에서) 일주일에 한 번 나올 수 있다고 해도.. 내 생각에는 잘 안 나올거 같은데..
취미 생활(블로그, 만화, 글쓰기)은 아직도 하고 있으려나? 으음, 잘 모르겠다.. 어른이 되서도 하긴 힘들겠지?
아, 혹시 애인 있..? 지금의 나는 없어. 올해 5월 초까지 00이랑 사귀었지.. 그리고 차이고.. 근데 아직도 친구처럼 잘 지내니까, 뭐. 사실 애인 없어도 그렇게 외롭거나 슬픈 건 없지.
졸업식 때 (고등)학교 캠프 때문에 못가게 되어서 슬프다.. 졸업식 때 하고 싶은 거 많았는데.. 애들이랑 사진도 찍고, 타임캡슐도 만들고, 000쌤 가발 벗는 것도 보고, 하다못해 졸업장 받는 거 하나까지..
그 전에 며칠 학교 갈 때는 애들이랑 체스나 낙서도 하고, 쓸데없는 잡담도 하고.. ㅋㅋ
일상이라는 거, 잃어버리면 소중한 걸 느끼는 거 같아. 바보같이. 평소에 더 잘 해두지 못함을, 더 많은 것을 해주지 못했음을 아쉬워하지..
부모님은 잘 계시니? 부모님께 잘 해드려.. 항상 짜증내고, 어리광 부리고 있지만..
있잖아, 난 항상 다시 태어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좀 더 성격도, 친구관계도, 외모도 고치고 싶어서. 그 이유를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매순간 노력하지 않는 자신에 대한 후회인 것 같아.
내가 소설을 쓰기 시작한 이유도, 사실 내가 원하는 현재, 미래를 그리면서 부터였잖아?
그런데 돌아보니까, 사실 나는 엄청 행복했던 것 같아. 친구도, 가족도, 지인들도 항상 나를 사랑해주고 있잖아.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거였어.
소설쓰는 건 그만두지 않겠지만, 지금의 내 처지를 탓하는 건 그만둘래.
언제 어디서나 무얼하든, 난 널 사랑하니까. 네가 가는 길에 축복이 있기를!!
어린 자라야,
나는 벌써 대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원 마지막 학기를 보내고 있단다. 하지만 더는 천문학자를 꿈꾸지 않아.
물론, 여전히 천문학은 너무 재밌고 매력적인 학문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인생에 조금 결이 다른 것들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단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이런 구절이 있어.
영원히 지속되는 꿈은 없다. 어느 꿈이든 새 꿈으로 교체된다. 그러니 어느 꿈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
어떤 꿈은, 최선을 다해 꾸었던 순간만으로도 온전해진다고 믿는다.
때때로 2014년의 나는 엄청 행복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해. 하지만 곰곰히 들여다보면 분명 힘든 순간들이 많았지. 억울하고, 화나고, 슬프고, 애통한 순간들. 그런 순간들조차 너를 이루는 한 조각이 되어서, 너는 그렇게 행복했구나.
10년이면 사람의 몸을 이루는 세포가 모두 교체된대. 그런데도 10년 전 네가 했던 생각 그대로, 여전히 나는 일상을 사랑하고 또 내일을 두려워 해.
10년 후의 또 나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 이제는 너에게 닿지 않을 편지를 띄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