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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우가 패한 이유는 ‘이것’을 터득하지 못했기 때문

by 마테호른


천하를 놓고 유방과 일전을 겨룬 항우(項羽)가 해하(垓下)에서 한나라 군사에게 포위되었을 때의 일이다.


이전까지 단 한 번도 패한 적 없던 항우의 100만 대군은 단 28명밖에 남지 않았다. 이들에게 한나라의 5천 군사가 공격해왔고, 결사적으로 싸운 끝에 2명이 죽고, 26명이 살아남았다. 그러자 항우는 훗날을 기약하며 그들을 배에 태워 강남으로 보냈다. 그들이 함께 가서 권토중래를 기약하자고 했지만, 항우는 끝까지 그것을 거부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강남 자제 8천여 명을 이끌고 처음 거병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을 모두 잃고 겨우 26명만 살아남았다. 모두가 나를 용서해도 내가 나를 용서할 수 없다.”


그리고 얼마 후 사방에서 초나라의 노랫소리(여기서 ‘사면초가(四面楚歌)라는 고사성어가 유래했다)가 들려왔다. 항우는 자신의 운명이 다했음을 직감하며 그 노래를 따라 불렀다. 옆에는 항상 그를 따르던 사랑하는 우미인(虞美人)과 명마 추(騅)가 있었다.


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세상을 덮을 만한데(力拔山兮氣蓋世)
때가 불리하니, 추조차도 달리려고 하지 않네(時不利兮騅不逝)
추마저 달리지 않으니 어찌할까나(騅不逝兮可奈何)
우야, 우야, 너를 어찌해야 할꼬(虞兮虞兮奈若何)

― 《사기》 〈항우본기(項羽本紀)〉 ‘해하가’


죽음을 앞둔 항우가 ‘해하가’를 부르며 자신을 애통하게 부르자, 우미인은 이렇게 답했다.


한의 병사들이 모든 땅을 이미 차지했고(漢兵已略地)
사방에서 초나라 노래가 들려오는데(四方楚歌聲)
대왕의 뜻과 기운이 다하였으니(大王意氣盡)
미천한 첩이 어찌 살기를 바라겠습니까(賤妾何聊生)

― 《사기》 〈항우본기〉 ‘우미인의 답가’


이 노래와 함께 우미인은 항우의 칼을 빼 자결했다. 최후의 결전을 앞둔 항우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를 본 항우 역시 도망가는 것을 포기하고 결국 최후를 맞았다. 그때 그의 나이 31세였다.


항우가 유방에게 패한 이유는 복합적이다. 그중 가장 큰 이유는 부족한 것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청나라 말기의 학자 리쭝우(李宗吾)는 ‘후흑학(厚黑學)’의 교주로 불린다. 그는 공자(公子)가 주장한 유교 사상에 맞서 인간의 근본은 ‘인의예지(仁義禮智)’가 아닌 ‘후흑’에 있다고 강조했다. 후흑은 ‘면후심흑(面厚心黑)’에서 나온 말로 ‘낯이 두껍고, 속마음이 시커멓다’라는 뜻이다.


그는 “군자와 영웅의 길은 후흑의 도를 닦는 데 있다”라고 강조하며, 후흑의 도를 3단계로 나누었다.


1단계는 ‘낯이 성벽처럼 두껍고, 속이 숯처럼 시커먼’ 수준이다. 하지만 이 단계만으로는 안색이 혐오스러워서 사람들이 다가오길 꺼린다. ‘낯이 두꺼우면서 딱딱하고, 속이 검으면서도 맑은’ 2단계에 이르러야만 어떤 공격에도 미동하지 않고 사람의 마음을 비로소 얻을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인 조조(曹操)와 유비(劉備)다. 속마음이 시커멓기로는 조조가 으뜸이며, 낯이 두껍기로는 유비를 빼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3단계는 ‘낯이 두꺼워도 형체가 없고, 속이 검어도 색채가 없는’ 경지로 아무나 이를 수 없다. 그에 의하면, 3단계까지 이른 이는 옛 성현 몇 사람뿐이라고 한다.


항우는 용맹하기만 할 뿐 ‘면후심흑’의 이치를 터득하지 못했다. 즉, 얼굴이 두껍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뻔뻔하고 음흉하지도 못했다. 부족한 것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인재의 소중함을 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얻지 못해 천하 제패를 눈앞에 두고 통한의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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