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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가 말한 ‘처세’의 기본

by 마테호른


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治世之能臣 亂世之奸雄).

“태평성대에는 유능한 신하가 되겠지만, 난세에는 간사한 영웅이 될 것이다”라는 뜻으로, 동한 말 인물평의 대가 허소(許昭)가 조조(曹操)를 두고 한 말이다. 전하는 바로는 조조는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그만큼 야망이 컸기 때문이다.


조조는 필요에 따라 자유자재로 표정을 바꾸는 ‘안면 바꾸기’의 달인이었다. 화낼 때는 두 눈을 치켜뜨고 노려보고, 자애로워야 할 때는 그윽한 목소리로 다독여주며, 슬퍼해야 할 때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또한, 기뻐해야 할 때는 손뼉을 치며 깔깔 웃기도 했으며, 근엄해야 할 때는 조용히 입술 양쪽 가장자리를 내려뜨릴 만큼 영민하고 처세에 밝았다. 이런 그의 얼굴 바꾸기에는 일관성이 숨어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중원의 평화를 이룩하는 것에 둔 강렬한 자의식이다. 그 때문에 기회를 포착하면 누구보다 과감했고, 주변의 눈치를 살피지 않은 채 자신만의 길을 갔다.


조조의 강렬한 자의식을 보여주는 말이 있다. “내가 세상 사람을 버릴지언정, 세상 사람이 나를 버리게 하지는 않겠다(寧敎我負天下人, 休敎天下人負我)”라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동탁 암살에 실패한 후 도망치던 중 현령으로 일하던 진궁(陳宮)에게 붙잡혔을 때의 일이다.
진궁의 호의로 목숨을 구한 조조는 그와 함께 도망치던 중 아버지 조숭(曹嵩)의 의형제인 여백사(呂伯奢)의 집에 하룻밤 머물게 되었다. 여백사는 진궁이 조조를 구해준 이야기를 듣고 마치 친아들을 구해준 것처럼 감사를 표하고, 후하게 대접하기 위해 가족에게 돼지를 잡으라고 한 채, 술을 사러 옆 마을에 다니러 갔다. 하지만 그 사실을 몰랐던 조조는 여백사의 가족이 칼을 갈자 자신을 죽이려는 것으로 오해하고, 그들을 모두 죽이고 말았다. 심지어 외출 후 돌아온 여백사마저 죽였다. 그러고는 함께 있던 진궁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세상 사람을 버릴지언정, 세상 사람이 나를 버리게 하지는 않겠다.”

― 《삼국지》 권1 〈위서〉 ‘무제기’ 중에서


생각건대, 조조의 삶을 이보다 더 정확히 보여주는 말은 없을 것이다.




조조는 처세에도 매우 밝았다. 4천여 명밖에 되지 않던 병력을 불과 몇 년 만에 수십 배 이상으로 만든 것이 그 방증이다. 그 비결은 실리(實利), 즉 당근과 채찍이었다.


조조는 누구보다 실질적인 효과와 이득에 밝았다. 그는 용인술에서도 이를 충분히 활용했다. 예컨대, 그는 아무리 작은 공이라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전투에서 승리하면 그 공을 모두에게 돌렸고, 장수부터 병졸에 이르기까지 한 명도 빼놓지 않고 상을 주며 그 노고를 치하했다. 패전했을 때도 질책하기보다는 자신에게 책임을 돌리며 장수들과 병사들의 마음을 먼저 헤아렸다. 성공의 열매는 부하들에게 돌리고, 실패의 책임은 온전히 자신이 진 셈이다. 그러니 군사들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은 것이 당연했고, 너나 할 것 없이 그를 위해 목숨을 다해 싸웠다. 이를 두고 조조는 이렇게 말했다.


누군가의 실수를 탓하는 것은 올바른 자세가 아니다. 항상 나의 잘못을 먼저 인정하는 것이 처세의 기본이다.”


그런 조조가 용서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군령을 어기는 것이었다. 한번은 원정길에서 한창 수확기에 이른 백성의 곡식을 한 톨이라도 밟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다. 그런데 그만 그가 탄 말이 뭔가에 깜짝 놀라 날뛰면서 곡식을 밟고 말았다. 그 즉시, 그는 투구를 벗고 칼을 빼 들었다. 하지만 한사코 말리는 장수들 때문에 말을 죽이지는 못하고, 자기 머리카락을 대신 잘랐다. 자신을 ‘곤형(髡刑))’에 처한 것이다. 곤형이란 고대 중국의 형벌의 하나로 죄인의 머리털을 깎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조조가 자기 머리카락을 잘랐다는 것은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한 것이었다.


그런 조조 역시 전투에서 계속 패하던 때가 있었다. 이때 겁에 질린 군사들은 도망가거나 적에 투항하곤 했다. 이를 본 조조는 “오랜 벗 위충(魏种)만은 끝까지 나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며 자신했다. 그런데 결국 그마저 달아나자,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그를 붙잡으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정작 군사들이 그를 붙잡아오자 ‘재능 있는 사람’이라며 다시 중용했다. 그리고 이 소식이 알려지자 도망갔던 이들 역시 하나둘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에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조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한나라 말 천하에 대란이 일어 영웅호걸이 함께 봉기하니, 원소가 사주(四州)에서 호시(虎視, 범처럼 노려봄)함에 강성하여 대적할 자가 없었으나, 태조(조조)가 주략과 지모를 내어 우내(宇內, 천하)를 편달(鞭撻, 독려함)했다. 신불해(申不害)와 상앙(商鞅)의 법술(法術)을 취하고, 한신(韓信)과 백기(白起)의 기책(奇策)을 갖추었고, 관직은 재능에 따라 부여하되, 각각 그 그릇에 맞게 썼으며, 사사로운 감정을 억제하고 냉정한 계산에 임해 옛 허물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마침내 황기(皇機, 황제의 정무)를 능히 총람(總禦)하고, 홍업(洪業)을 이룬 것은 밝은 지략이 뛰어났기 때문이니, 가히 비상한 인물로 초세지걸(超世之傑)이라고 할 만하다.

― 《삼국지》 권1 〈위서〉 ‘무제기’ 중에서


이런 모습이 때로는 그를 통 크고 관대한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 하지만 이는 그의 수많은 모습 중 하나였을 뿐이다. 그만큼 변화무쌍했고, 다양한 얼굴을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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