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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이 Apr 12. 2022

눈 오는 날엔

어렸을 때는 눈만 오면 화이트 크리스마스라며 좋아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창밖으로 소복하게 쌓인 눈이 보이면 마음이 그렇게 설렜더랬다. 곧바로 동생과 나는, 스키 타러 가면 입자고 70% 세일가로 샀지만 정작 스키장에서는 한 번밖에 안 입은 스키복을 챙겨 입고, 새 둥지가 틀어진 머리에 털모자를 푹 눌러쓰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른 아침부터 사람 발자국 하나 없이 새하얗게 쌓인 눈 위로 내가 첫걸음을 떼야 했고, 차 위에 쌓인 깨끗한 눈에 손바닥을 찍어내야 직성이 풀렸다. 아파트 단지 내 잔디밭에는 간혹 고양이 발자국이 사라질 듯 말 듯 어렴풋이 남아있었고, 우리는 그 위로 눈사람의 머리가 될 눈덩이를 굴리며 내달렸다. 방수라고 하던 스키복이 축축해질 즈음 따스한 집으로 돌아가 따뜻한 물로 씻고는 단잠에 빠졌다. 그때는 왜 어른들이 눈이 많이 오는 걸 그렇게 싫어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오늘도 새벽부터, 아니 어젯밤부터 보슬보슬 눈이 내렸다. 아침 6시 50분 출근을 하기 위해 차에 올랐다. 집에서 도축장까지 운전해서 30분, 왕복 한 시간이었다. (현재는 연고지 근처 도축장을 다니는 중이다.) 흡사 눈보라 속에서 운전하는 것 같은 짜릿함을 느끼기엔 좋았지만, 블랙아이스 위에서 드리프트 할 용기는 없었다. 혹여나 미끄러질까, 차가 좁은 보폭으로 걸을 수 있다면 그렇게라도 천천히 운전하고 싶었다. 심장이 콩알만 해졌고 척추를 따라 식은땀이 또록- 흘려내리는 것 같았다. 나를 마구 지나쳐가는 차들에게 먼저 가세요- 저는 괜찮습니다- 하고 꾸벅꾸벅 인사해주며 두 손으로 꼭 핸들을 잡았다.


대게 도축장은 시골에 위치해있다. 도로 양옆에 논과 밭을 끼고 굽이굽이 한참을 달려가다 보면, 여기 뭐가 있어? 할 즈음에 도축장이 나타난다. 거기다 주차장이 보통 지상에 있는 노외주차장일뿐더러 차광막도 없었다. 그렇게 덩그러니 세워진 내 차는 불쌍하기 짝이 없었다. 뜨거운 여름엔 직사광선을 있는 그대로 흡수하는데, 과장 보태 용광로에서 갓 태어나 녹아 흐르지 않는 것이 더 신기한 차가 되었고, 겨울엔 차 위로 두터운 눈이불을 덮은 듯이 눈이 쌓여 차는 바닥과 한 몸이 되어 사라져 버렸다. 오늘은 그런 날이 될 것 같았다. 눈 속에 파묻힌 차를 찾아 떠나는 도축장 앞 삼만리. 뭐 그런 느낌.


밖에는 눈이 펑펑 내렸고, 소를 판정하는 냉장고보다, 돼지를 판정할 때 서있는 -40도 냉동 터널 앞보다 밖이 더 추웠다. 지금은 위생상 그렇게 하지 못하지만, 옛날에는 소를 도축하면 밖에 널어놓고 곶감 말리듯이 바깥 찬바람을 맞혔다고 한다. 10여 년 전만 해도 냉장고에 걸어놨지만 밖의 온도가 더 낮으면 냉장고까지 통하는 문을 죄다 열어놓고 소의 온도를 더 빨리 낮췄다는 전래동화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기도 한단다. 그렇게 부장님이 이야기해주는 전래동화에 젖어들며, 금방이라도 순록과 함께 산타가 나타날 것만 같이 눈 덮인 하늘을 감상했다. 퇴근길, 질척질척해진 길에서 미끄러지지 않고 안전하게 운전해야 한다는 걱정과 함께.


퇴근하려고 나오니 아니나 다를까, 얼마나 눈이 많이 왔는지 주차장에 있는 차 모두가 20센티는 더 되는 두터운 흰색 이불을 함께 덮고 있었다. 그 차가 그 차 같았다. 겨우 찾은 차는 왜 이제 왔냐며 울상을 짓고 있었다. 앞뒤, 양옆 할 거 없이 눈이 무겁게 덮여있었다. 앞유리에 쌓인 눈을 치우지 않고 그냥 차에 들어가 그대로 와이퍼를 돌린 적이 있는데, 와이퍼를 켜는 순간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부드드득-거리는 끔찍한 비명을 지르더랬다. 나도 함께 차 안에서 비명을 지른 뒤로는 팔뚝으로라도 슥슥 대충 눈을 치우고 탄다. 사이드미러와 옆유리까지도 하늘이 뿌려준 눈덩이로 뒤덮여있지만, 귀찮고 춥고 옷이 젖는 게 싫으니 그냥 일단 차에 탄다. 차 안은 고요하다. 뒷유리까지 하얗게 꽉 막혀있으니 귀마개를 끼운 귀속이 이런 느낌일까- 적막 속에서 잠시 사색을 해본다. 그리고 어렸을 때 차에 쌓인 눈을 치워버린 어린이들(나)에게 감회를 느껴본다. 여기에 아이들이 있다면 마음껏 차 위에 쌓인 눈 다 치워도 된다고 하고 싶, 아아니, 차 위에 뽀얗게 쌓인 눈 좀 제발 가지고 놀아달라고 하고 싶었다.


잠깐의 명상이 끝나면, 얼음 같은 차 안에서 내 몸을 부르르 떨고는 기어를 드라이브로 바꾼다. 뒤가 잘 안 보여 운전석 창문을 지익-하고 내려보는데, 창문만 내려가지 그 위에 쌓인 눈은 그 모양 그대로 있다가 와르르 무너지며 차 안으로 침범해 버리니 조금씩 찔끔찔끔 열어본다. 얼굴을 창밖으로 내밀어 눈 내린 차가운 기운이 코끝에 닿는 동시에 상쾌한 기운이 감돌다가도 양볼이 빨갛게 얼어버릴 것만 같았다. 옆과 뒤를 도리도리 하며 차가 없는지 확인을 하고 나서야 살짝 출발해 본다. 부앙 소리 없이 스무스하게 출발한다면 살살 속도를 높여본다. 그러면 본넷에 쌓여있던 눈이 휘몰아친다. 눈이 그쳐도 내 앞에서 눈보라가 치는 걸 감상할 수 있다. 나만을 위한 스노우 쇼다. 0.5초 정도 앞이 완전히 가려 식겁도 해보고 눈발을 감상하기도 하면서 살살 액셀을 밟다 보면, 차는 따뜻해지고 붙어있던 눈들도 녹아 없어진다. 그 자리엔 거뭇거뭇한 자국이 남겠지. 언제 또 세차하지, 겨울이 완전히 지나고 새싹이 돋아날 때 즈음이면 흰 차가 검은 차가 돼있으려나- 창문만 보이면 됐지-라고 생각하며, 어린 시절 그 순순했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그렇게 천천히 도축장에서 집으로 향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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