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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이 Mar 17. 2023

영웅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평화로운 점심시간이었다. 하늘도 파랗고 선선한 바람이 부는, 어쩐지 포근한 겨울. 든든하게 점심을 먹고는 고요한 휴식을 보내고 있었다.


"불이야!"


다들 학창 시절에 소방대피훈련이랍시고 갑자기 불이 났다며 사이렌소리가 울리고 우르르 운동장으로 대피하는 경험이 있을 것 같다. 그런 줄 알았다. 누가 장난치는 줄 알았다. 작업장 한 개와 외국인 기숙사 한 개, 컨테이너박스로 된 사무실 한 개로 이루어진 내가 출근하는 이 회사는 보통의 학교보다도 작은 규모지만, 간간이 소방훈련을 의무로 실시하기 때문에 행사인 줄 알았다. 


하지만, 사이렌 소리는 없었다. 어떤 아저씨가 '불이야-' 크게 소리 질렀는데, 그 외침은 점점 겁에 질린 목소리같이 느껴졌다. 나와 팀장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게 진짠가요? 하고 창밖을 둘러보았다. 어디선가 탄내가 코를 찔렀다. 아, 이거 진짜다.


급하게 사무실에 구비해 두었던 소화기를 한 개 옆구리에 안아 들고 1층으로 우다다 내려갔다. 작업장 뒤쪽에 작은 문에서 검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이기 시작했고, 나는 급하게 소화기를 건넸다. 건물 내부는 불이 나갔는지 어두컴컴했다. 몇몇 아저씨들이 주춤거리며 들락거렸지만, 나는 이게 실제상황인지 가늠이 가지 않아 멍하니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얼굴에 그을음을 잔뜩 묻힌 아저씨가 연신 기침을 하며 뛰쳐나왔다. 손에는 반쯤 검게 탄 수건을 들고 있었다.


"내가 껐어!"


엄청나게 빠른 조치였다. 합선으로 인해 작은 불꽃이 일었던 듯한데, 불길이 번지기도 전에 발견한 아저씨가 놀란 마음에 목에 두르고 있던 수건으로 냅따 후려쳐버린 거였다. 그제야 물을 가득 채운 양동이를 들고 헐레벌떡 뛰어오는 아저씨들도 있었다. 빠르게 진화가 되어 필요가 없어졌지만, 큰 불이 되기 전에 막은 건 천만다행이었다. 


도축장에선 간간이 불이 나곤한다. 지붕이 다 타버린다던지, 며칠, 몇 주 문을 닫는다던지 생각보다 큰 불이 나기도 한다. 그럼 우리의 식탁에 오르기 위해 도축된 소와 돼지, 그리고 도축을 기다리고 있던 살아있는 돼지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검사관이라고 불리는 수의직 공무원들이 그 생물들을 먹을 수 있을지 없을지 판단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유독가스에 노출된 고기와 가축들의 운명은 그들이 정하지만, 사실 대부분은 폐기된다. 잠깐의 유독가스로도 치료해야 하는 인간에게 좋을 리가 없기 때문. 그러면 소 한 마리에 최소 600만 원, 돼지는 50만 원으로 잡아도 1억 손실은 금방이다. 도축해 주는 비용만 받는 도축장은 고깃값을 물어주어야 하고 이것은 엄청난 금전적 손실이라는 말이다. (소돼지는 도축장 소유가 아닌 농가 소유라, 도축장은 지나가는 유통단계일 뿐이다) 덕분에 폐기된 고기를 몰래 유통하다 걸린 곳도 있다고 전래동화처럼 들려온다.


아무튼, 다시 불을 끈 영웅 아저씨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뉴스에 보도되는 영웅들은 하나같이 생각보다 몸이 먼저 나갔다고 말한다.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때 생각할 겨름도 없이 이미 몸은 행동하고 세상을 구하는 거다. 우리 주변에도, 가까운 곳에도 영웅은 있었다. 영화처럼 잘생기고 키 크고 멋진 영웅은 아니지만, 빠른 조치로 많은 사람들을 구해내는 멋진 영웅 말이다. 이상한 대피훈련으로 모두의 마음은 무뎌졌을지 몰라도, 한 공간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서로가 영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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