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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파크 북DB Jul 07. 2017

소설가 황석영 “소설도 제조업, 시장 무시하면 안 돼”

<수인> 황석영 작가 인터뷰



“― 자아, 여기서부터 속세입니다. 나가서 잘 사세요. 나는 목례를 하고 문을 나섰다.(...) 감옥에서의 현실이 벌써부터 먼 옛날인 것처럼 아득한 느낌이었다. 술이 덜 깬 새벽의 기분과도 같다고나 할까” <수인> 2권 p.435~436 중


유독 요철이 심했던 한국 현대사. 그 시기를 온몸으로 부딪히며 보낸 이들 덕에 역사는 전진했다. 그중 일정 지분은 소설가 황석영의 몫이다. 황석영은 지난 6월 10일 자전 <수인>(문학동네/ 2017년)을 발표했다. 이 책은 한국현대사의 굵직한 사건 속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삶을 산 그의 인생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다. 이야기는 그가 방북 이후 오랜 국외 망명 기간을 보낸 뒤 1993년 4월 체포되어 안기부의 심문을 받는 장면에서 시작해, 1998년 3월 특별사면으로 석방되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1943년 만주에서 출생해 평양에서의 유년 시절, 한국전쟁, 4.19 베트남전쟁, 유신독재, 5.18 광주항쟁을 겪고, 1989년 북한 땅을 밟았다는 이유로 수감 생활까지… 현대사의 전방에는 그가 있었다.


황석영이 단골로 출입한다는 일산 정발산동의 한 커피숍. 인터뷰 약속 시간은 오후 3시였다. 평일 오후 서울 시내 도로 체증을 염려한 나머지 기자는 약속 시간보다 40분 일찍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황석영이라는 이름 앞에서 느낀 중압감도 서두르는데 한몫했다. 그렇게 긴장과 피로감이 겹쳐진 채 그를 기다렸다. 그렇게 한 10분 정도가 흘렀을까, 그의 모습이 보였다. 약속 시간보다 30분 빠른 시간이었다. 청바지, 헐렁한 티셔츠에 푸른 남방을 걸친 자유로운 모습. 집에서 담배를 못 피우게 한단다. 카페에 담배를 맡겨두고 하루에 한두 번씩 와서 피운다고 했다. 그 날도 혼자서 잠시의 여유를 누리려고 일찍 도착한 것이었다.


황석영은 민주주의의 문제, 남북문제에 관해 이야기할 땐 사뭇 심각한 표정을 짓다가도 개인적인 이야기에 이르면 너털웃음을 지으며 소탈한 자세로 응답했다. 그는 높고 신비로운 작가이기보다는, 버스 옆자리, 시위 현장에서 함께 촛불을 들고 있을 것 같은 노동자들의 작가였다. 75년 평생 한반도의 수인이자, 5년간 실제 감옥에서 수인으로 생활한 그의 이야기에 주목할 가치는 충분하다.


“실패했거나 모자란 부분 밝히는 게 자전...그래야 뒷사람 실수 줄일 수 있어”


Q <수인>의 에필로그에서는 어깨에 생긴 염증이 회복된 걸로 나왔는데요. 다시 어깨가 안 좋으시다고요.


거의 나았었죠. 그런데 요새 사인회하고 돌아다녔더니…(재발했어요). 얼마 끄적거리지도 않았는데 큰일이에요.


Q <수인>에서 선생님의 인생을 알게 되는 즐거움도 있지만, 한국 현대사 속 주요 인물들에 대한 솔직한 평가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초고는 더 그랬는데 다 뺐어요. 얄미운 놈들도 많이 있지 않겠어?(웃음) 간혹 인물에 따라 시니컬하게 쓰기도 했어요. 비아냥거리고 그래야 재밌잖아. 편집자가 ‘그러지 말고 좋게 좀 쓰자’고 해서 양보해서 시니컬한 부분은 다 뺐죠.


Q 소설 이외에 작가 개인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건 처음이라고 하셨지요. 쓰는 데 망설여지는 부분은 없었습니까?


원래 자전이라는 게 자기 자랑을 늘어놓거나 잘난 척을 하는 게 아니라 실패했거나 모자란 부분을 밝히는 게 자전이에요. 그래야 다른 사람들이 같은 실수를 안 할 것 아니야. 이를테면 나는 직업적인 활동가에 비하면 정치적 협상을 하는 데 있어서는 굉장히 아마추어잖아. 가령 범민련(조국통일범민족연합)의 과정을 보면 난 소설가니까 개인 혼자서는 못 견디거든. 그런 과정이 많이 나와요. 소설가가 정치 활동을 하는 데 서툰 게 드러나잖아.


Q ‘황 포레스트 검프’라는 별명답게 현대사의 중요한 장면마다 계셨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몸을 사릴만한 상황에서도 그러지 않으셨는데요. 두려움을 이겨낸 원천은 무엇일까요?


나는 젊었을 때부터 ‘내 작품과 인생을 합치시키는 인생을 살겠다’고 선언을 한 적이 있어요. 선택이 애매모호하고, 내가 어떻게 결단해야 할지 고민될 때마다 독자들을 생각했어요. ‘내 독자들은 나에게 무엇을 바랄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독자들의 자존심과 바람을 위해 이건 해야 한다’고 결심할 때가 종종 있었죠.


Q 선생님 개인의 자존심이기도 하지만, 선생님 작품을 읽는 독자들의 자존심이기도 한 거네요.


그렇죠. 고객에 대한 성실성이라고 할까. 그래야 그들(독자)이 신뢰할 수 있는 물건을 생산할 수 있지 않겠어? 글 써서 책 내는 것도 제조업이에요. 실제로 세금 분류에 제조업으로 되어 있어. 수공업 제조업자지. 필기도구를 산다든가, 컴퓨터를 새로 사는 것뿐 아니라, 여행을 가는 것도 자료 수집 행위로 쳐서 다 비용 처리가 돼요. 그러니까 분명히 제조업이야. 내가 기계이자 제조하는 생산 본부 아냐? 나이가 들고 필력이 떨어지면 세금도 봐줘야 하는데 그런 게 없어.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한국 사회는 글 쓰는 일을 작가 자신이 신비화하거나, 사회가 그걸 마치 비상업적인 일처럼 굉장히 고상한 행위를 하는 걸로 분류해요. 물론 허드렛 일을 하는 것보단 사회에 보탬도 되고 낫겠지. 내가 제조업자라고 했는데, 시장에서 독자를 만난다는 점에서 같은 것이라고 봐요. 70년대에 ‘나는 매문은 안 한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젊은 작가가 자기가 쓴 글을 잡지사나 출판사에 들고 가서 원고료를 달라고 하면 ‘선비가 매문을 하러 다녀’라고 해. 그럼 그 사람은 뭐로 먹고 사는데? 노력의 대가를 줘야지.


김수영 선배도 그랬다고 하는데, 나는 원고료를 받아내는데 굉장히 치열했어요. 그 이유는 원고료는 노동의 대가고, 그걸 통해서 자기 작업의 성실성을 가질 수가 있어요. 나는 시장을 존중했죠. 내가 단행본 첫 세대거든. 지금도 “작가가 가난해야지”, “돈만 아느냐”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시장 무시하면 안 돼. 시장에서 살아남아야 해. 시장이 아니면 어디서 독자를 만날 거고, 독자를 만나지 못하면 어떻게 세상이나 사회를 바꾸고 영향력을 줄 건데? 어떤 이상적인 ‘구라’를 친다 해도 그 조건을 인정해야 돼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글 써서 상품으로 내놓고, 이걸 팔아서 먹고산다는 걸 인정해야 합니다.

 


문학으로부터 계속 도망다니다가 결국 문학이라는 집으로 잡혀 오다


Q “그건 자기 팔자를 남에게 내주는 일이란다” 소설가를 꿈꾸는 아들을 말린 어머니의 <수인>의 앞머리 문장을 읽고서 아주 무거운 추가 심장을 누르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결국은 작가가 되어 어머니 영전에 자전을 바치는 심정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우리 어머니는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이고 작가나 문학작품을 많이 읽고 좋아했음에도 작가로서의 생이 평탄치 않을 거라는 것을 다른 예를 미뤄봐서 잘 알잖아요. 또 세상이 난세니까 자기 자식이 보다 안정된 직업을 갖고 살아가기를 바랐겠지. 어떤 평론가가 술자리에서 한 말이 있어요. 젊었을 적 황석영은 어머니로부터 도망 다니면서 자유를 쟁취하다가 집으로 잡혀 오곤 했는데 작가가 된 황석영은 문학으로부터 계속 도망 다니다가 결국엔 문학이라는 집으로 잡혀 왔다고. 적절한 비유라고 생각해요.


Q 어머니께 미안한 감정을 많이 표출하셨더라고요.


어머니께 불효지. 내가 다 표현하진 않았지만 정말 속 썩이는 아들이었거든. 교정 보는 집사람이나 주위 사람들이 원고를 보다가 “이거 내 자식 같으면 때려죽이고 말지. 이걸 왜 길러” 그랬어요.(웃음) 자살 미수에 살려 놓으면 도망가고, 머리 깎고 중 되고, 군대 가서는 베트남 전쟁 가고 그러니까 청년이 되어서도 계속 속 썩인 거지.


Q <수인>은 1998년 3월 특별사면으로 석방되는 대목에서 끝이 납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조금 찡해지기도 했는데요. 그 후의 이야기를 쓰실 계획은 없으신가요?


원래 4부작인데 4부를 잘라버렸지. 감옥에서 나온 뒤 20년 동안 내가 겪은 세계부턴 잘라버렸어요. 앞에 부분만 가지고도 너무 얘기가 많고, 지금 75살이니까 시간이 많지 않잖아. 뒷부분은 기록만 해서 자료로 놔두고 후대에 오는 사람이 평전을 쓰겠다고 하면 자료로 내주면 되잖아. 그래서 이런 식으로 처리했지. 대개 다른 나라의 자서전도 보면 인생의 4분의 3 정도에서 끝을 내요. 어떻게 자기가 살아있는데 다 쓰겠어. 죽고 나면 그런 것들이 선명하게 드러나겠지. 그건 내가 할 일은 아니야.


Q <수인>은 역사적, 한반도에서 작가의 삶을 가리키는 은유적인 의미이기도 합니다만 실제 감옥에서의 삶을 묘사한 것이기도 합니다. 감옥에서 보낸 5년의 기간을 무엇이라고 평가하고 싶으세요?


감옥에서 일상을 배웠다고 할까. 소시민적 일상은 아니고 치열한 일상이지. 내가 모험에 능하고 변화를 전혀 무서워하지 않잖아. 그런 건 신이 나는데 ‘너 꼼짝말고 앉아 있어’ 했을 때 제일 힘들지. 가장 성질에 안 맞는 일이 독방에 앉아있는 거야. 처음에는 징역살이하며 투쟁하다 보니 죽겠더라고, 나는 감옥에서 읽는 책은 ‘관념의 수집’이라고 생각해요. 독서라는 행위가 일상생활 속에서 다른 사람도 만나고 소통하는 게 독서지. 독방에서는 관념만 들어와요. 문학의 세계 또는 예술의 세계라는 건 디테일의 세계인데 관념의 기둥만 남잖아요. 그래서 이른바 잡범이라고 하는 일반수들이 가진 일상의 디테일을 같이 호흡하고 주고받으려 노력했죠. 그들과 친해지면서 건강도 좋아졌어요.


Q 투옥 생활이 선생님껜 비극적인 일이었지만 독자 입장에서는 새로운 세계라 흥미로웠습니다.


원래 지옥에 재미있는 일이 많아요. 싸움도 없고 갈등도 없는 천국에 가면 하얀 원피스 입고 훨훨 날아다니면서 서로 노래나 할 텐데 그게 무슨 재미가 있겠어. 지옥이니까 재밌는 거지. 자본주의 사회의 감옥은 사회의 축소판이에요. 사회 계급 그대로야. 돈이나 힘 권력에 의해 먹이사슬처럼 서열화되지.


Q <수인>은 황석영이라는 작가의 자전이자, 옥중 수기이기도 하지만, 또한 거대한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로도 읽혔습니다.


나는 살면서 죽을 고비를 많이 넘겼어요. 죽음에 굉장히 익숙하고 죽음이 늘 가까운 곳에 있었어. 그게 작가로서 불리하지 않지. 그렇게 따져 보면 운이 굉장히 좋았던 것 같아. 죽을 고비를 많이 넘겼는데 잘 모면하고 넘어갔죠.


 


“국가보안법 체제와 휴전 체제 극복해야 사람다운 삶 살 수 있을 것”


Q 19세 때 5.16 군사 쿠데타를 겪었고, 75세가 되어서야 박정희 대통령의 딸 박근혜 대통령이 물러나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간의 상황을 지켜보신 소회가 어땠는지도 궁금합니다.


우리는 식민지에서 풀려나고 개발 독재를 하면서 공공성을 자주적으로 민중 스스로가 만들어 간 게 아니라 누군가 힘 있는 세력이 만들어서 주는 걸로 인식이 됐어요. 좀 배운 사람이어야 하고, 돈이 있어야 그런 가치를 고민할 수 있다는 식으로. 우리의 근대화는 민주주의를 억압하면서 시행된 것이거든요. 그러다 보니 서구보다 훨씬 왜곡이 심하죠. 6월 항쟁 이후 정권이 바뀌고 민간 정부로 넘어왔음에도 과거 군사 독재에 부역하고 그것을 끌고 온 장본인들이 지난 30년간 세력을 잃지 않고 계속 왔어요. 이런 근대화의 잔재들이 박근혜 때 다시 재현된 셈이죠. 이번에야말로 박근혜가 자기 아버지 업보까지 보따리 싸서 간 거예요. 이제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한계나 폐단을 척결하고 극복해서 선진사회를 만들어야 하겠죠.


Q 선생님께서 1989년 방북하셨을 때보다 시간은 더 흘렀고, 남북관계도 많이 냉각됐습니다.


한반도는 두 가지 축으로 분단체제가 운행되고 있어요. 하나는 국가보안법을 근간으로 하는 48년 체제. 일제 치하에 독립운동가들 때려잡고 말 안 듣는 사람을 통제하려고 만든 치안유지법이 있었어요. 그 치안유지법을 제목하고 조항만 개정해서 만든 게 국가보안법이에요. 국가보안법은 ‘너 간첩 아니니까 괜찮잖아’ 그러는데, 그렇지가 않단 말이에요. 우리가 통일하려면 북한과 대화하고 잘 지내야 하는데 이 법 때문에 원천적으로 그걸 못하게 되어 있어요. 두 번째가 53년 체제, 즉 휴전체제예요. 1953년에 전쟁이 끝난 게 아니라 휴전된 것이거든요. 휴전은 전쟁 중이란 얘기야. 지금 우리는 대포 위에서 자고 깨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53년 체제와 48년 체제, 국가보안법 체제와 휴전체제를 극복해야만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거예요.


외국 가서 행사하면 외국 작가들이 “너희 전쟁 나는 것 아니냐”고 묻는 게 어제오늘 일이 아니에요. 얼마 전 열린 국제 문학 행사에도 많은 작가가 안 왔어요. 핵 항공모함이 북한 영해로 들어가니까 전쟁 나는데 거기 왜 가느냐고 해서요. 온 작가들도 조마조마하면서 왔대요. 미국이 자기 맘대로 한반도에 들어오기도 하고, 위협도 하고, 전쟁할 거라고도 하는데, 이 모든 게 우리 권한 밖이라는 게 말이 됩니까. 그런데 이런 자명한 얘길 하면 빨갱이래요. 젊은 사람들이 이런 세상을 바꿀 거라고 생각합니다.


Q 이전부터 ‘철도원 삼대’ 이야기를 쓰겠다고 하셨는데요. 어떤 이야기인가요?


근대문학을 보면 식민지 시대부터 지금까지 농민을 중심으로 한 서사는 많은데 도시 노동자, 강철 노동차, 철도 노동자 등 노동자가 중심이 된 문학은 없어요. 그 부분이 빠져있어요. 그 부분을 채워 넣으려고 해요. 그걸 옛날식으로 쓸 생각은 없고 현재와 연결하는 작업을 하려고 해요. 옛날 같으면 10권짜리 대하소설로 써야 하겠지만 지금은 천오백 매짜리 두꺼운 한 권으로 완성하려고 해요.


Q 여러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밀린 원고에 관한 책 빚에 대해서 언급하셨습니다. 책 빚은 많이 청산하셨나요?


문학동네는 <수인>으로 다 갚았고, 창비에 빚이 남았지. 그걸 ‘철도원 삼대기’로 갚으면 돼. 내가 앞으로 더 얼마나 쓰겠소? 두세 권 쓰면 되지 않나? 오에 겐자부로는 81세, 마르케스는 82세까지 썼잖아. 내 외국 에이전트는 영국 여자인데, 나에게 앞으로 15년 더 하라고 해. 15년 뒤면 나도 90이야. 90까지 뭘 더 써. 한 10년 더 하고 유유자적하고 쉬다가 죽어야지.


글 : 주혜진(북DB 기자)

사진 : 임준형(러브모멘트 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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