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단의 예쁨을 받는 작가는 아니다”라는 자기 평가에 서슴없는 작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편적이고 대중적인 것’에는 흥미가 없기에 ‘불편한 작품’으로 독자들의 마음에 스크래치를 내는 작가이고 싶다는 소설가. 지질하고 우울한 마흔 언저리의 초상들을 그려낸 네 번째 단편집 <사십사>는 백가흠의 문학적 의지가 단연 극적으로 드러난 작품이다. 지난 2011년부터 발표한 아홉 편의 단편을 모은 이번 작품은 각 주인공들을 통해 40대로 살아가는 다양한 인간 군상의 맨 얼굴을 마주하게 한다. 그의 말마따나 화려하게 보여도 한 발짝 다가서면 실금이 잔뜩 가 있는 집처럼 매사에 노심초사하며 불안함을 안고 사는 세대. <사십사>는 그런 마음을 잘 숨겨놓는 것에 익숙해진 이들에 대한 연민이자, 자기를 점점 잃어가는 만큼 뻔뻔해지는 양면성을 지닌 자기 세대에 대한 작가의 고백이기도 하다.
Q <사십사(四十四)>라는 제목에 궁금증이 생기더라고요. 40대에 대한 이야기는 맞는데, 왜 하필 ‘사십사’인 건지. 한 인터뷰에서는 ‘한자 사(四)’가 눈물 맺힌 그렁그렁 한 눈처럼 보였다고 하셨는데, 제목에 숨은 의도가 궁금했어요.
제목에 특별한 의미를 담은 건 아니에요. 그냥 소설의 일부라고 해야 하나? 큰 의미를 두진 않았어요. 왜 하필 ‘사십사’로 했냐면, 이제 막 30대를 벗어난 마흔한 살, 마흔두 살은 여전히 자신이 30대 언저리에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기 마련이거든요. 마흔셋이나 마흔넷 정도나 되어야 ‘이제 사십대구나’ 그런 걸 느끼는 나이라서 사십사로 했죠. 저도 그런 것에 대한 자각이 많이 와요.
Q 책에 실린 아홉 편의 작품들은 2011년부터 발표한 단편 소설들을 모은 네 번째 소설집이에요. 그 사이에 30대에서 40대가 되었네요. 삶의 변화를 어떻게 체감하고 계신가요?
음, 체력적인 것? 그게 가장 큰 것 같아요. 어휴, 너무 힘들어요. 몸이 너무 힘들어. (웃음) 일할 때는 낮과 밤이 바뀌는 사람이라서 더 느껴지죠.
Q 언젠가 ‘작가들도 보편적인 삶에 대한 일상성을 찾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라고 하셨는데, 작업하실 때는 어쩔 수 없나 보네요.
작업할 땐 너무 힘든 것 같아요. 단편 쓸 때는 그게 더 힘들어지고요. 왜냐면 짧은 시간 안에 에너지를 다 쏟아붓거든요. 장편은 1년, 8개월, 6개월 뭐 이런 시간을 가지고 작업하는데 단편은 작업시간이든 결과물이든 굉장히 압축적이잖아요. 전 아직도 단편들이 상징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 압축되고 짧을수록 좋은 것 같아요. 그래도 한 달은 걸리죠. 확실한 건 장편보다는 단편 작업이 더 힘들어요.
Q ‘작가의 말’에 ‘단편 소설에 대한 미안함에 대해 이야기하셨어요. 장편을 쓰다가 지치면 단편소설을 틈틈이 썼다고 하셨는데, 그런 작업 과정과 관련된 이유인가요?
장편을 쓰는 여정 안에서 단편은 하나의 과정인 것 같은 느낌. 그런 의미에서 미안한 마음이죠. 그런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단편을 쓰면 정말 진 빠지거든요. 긴 여정을 위해 먹는 약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데 이제는 단편을 많이 소화하지 못하기 때문에…. 장편과 단편의 텀을 일정하게 유지하기가 쉽지 않아요. 생각해 보면 단편 작업을 하는 사이에 장편을 냈으니까, 이전과는 반대의 상황이 된 것 같은 기분도 들고요.
Q <사십사>에는 마흔 즈음의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아홉 편의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마흔 언저리에 있는 이들은 가지각색의 모습으로 제 나이를 살아갑니다. 때로는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리기도 하고, 자신의 이력을 조작하여 선망의 대상이 된 것에 우쭐해하기도 하고요. 각 이야기의 주인공들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으셨나요?
하나의 주제를 관통하는 것들이었어요. 인물은 문학적인 주제의식을 담는 그릇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예를 들어 20대 때는 화려하고 문양이 넘치는 식기류를 좋아했다면, 나이에 따라 음식을 담을 때 느껴지는 모양새들이 조금씩 변하는 것 같아요. 왜 40대에 대한 이야기인지 답을 드린다면, 가장 담기 편하고 그릇의 모양이 아니어도 그릇으로 쓸 수 있는, 그런 활용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도 40대인데 비관적이기도 하고 이 세계가 염세적으로 보이니까 멀쩡히 살아 있음에도 이미 속은 죽어가기 시작한 것들이 눈에 밟히기 시작했거든요.
Q 다루고자 하는 주제가 ‘외면’에서 ‘내면’의 것으로 옮겨진 거네요.
네.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힌트는 도련님>을 쓸 때가 과도기였던 것 같아요. 너무 큰 주제만 담으려다 보니 소설 쓰는 게 힘들고 그만하고 싶고, 잘 되지도 않고 그랬어요.
Q 작가의 말에도 그런 얘기 나오더라고요. “내가 지금까지 소설을 쓰고 있을 줄 몰랐다”라고.
하하. 준비한 건 이제 다 끝났어요. 이미. (웃음) 마음속으로 준비했던 주제들은 장편 세 개, 소설 집 하나면 끝나는 거였는데 조금 더 하고 있는 거죠. 그 사이에 예정에 없던 <마담 뺑덕>도 냈잖아요. <힌트는 도련님> 때부터 좀 멀리보기 시작하면서 마음이 편해졌어요. 선배들은 그걸 두고 ‘나이 들어가는 거다’라고 하더라고요. 뭔가를 계획해도 10년 단위로 늘어나고. 저 진짜 2011년부터 2015년까지 매년 한 권씩 냈거든요. 그런데도 글 쓰면서 힘들다는 생각이 들진 않아요. (부담감을 내려놔서 그런 거겠죠?) 네. 그런 것 같아요. 저, 지금도 받은 상이 하나도 없거든요. 그때는 상도 타고 싶고 잘 살고 싶고 그런데 할 줄 아는 건 소설 밖에 없으니까 소설이라는 것 안에 내가 이루고자 했던 모든 바람이나 소망을 다 집어넣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너무 버거운 거예요. 과도기를 겪으면서 그전의 작품들을 폐기할까 생각도 했었어요. 저도 어렵고, 문단에서도 원치 않으니까. 제가 예쁨받는 것도 아니고요.
Q 어떤 의미인가요?
제 소설을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거죠. 그런 분들이 있대요, 얘기를 들어보니까. 그런 피드백에 대한 데미지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라서 나도 뭔가 좀 더 대중적이고 보편화된 것들을 취해볼까 했는데, 재미없어서 못하겠더라고요. 저는 독자가 제 책을 읽고 뭔가 좀 불편했으면 좋겠고, 작품으로서 독자들 마음에 스크래치를 내는 그런 작가이고 싶어요.
Q 이 작품들의 주인공들은 40대의 다양한 자화상이에요. 지질하기도 하고 때론 우울하고, 그런 40대의 모습을 아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거죠. 개인적으로는 ‘흉몽’의 주인공이 가장 극단적으로 표현된 인물처럼 느껴졌어요.
불안한 거죠, 그들은. 저 역시 40대가 된 후에 전보다 부드러워졌다고 얘기를 하고 있고 실제로도 그렇지만, 내면의 불안과 두려움은 더 커지는 것 같아요. 그런 감정을 잘 숨기고 눌러 놓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이 40대가 아닐까 싶어요. 언젠가 인터뷰에서 이런 표현을 쓴 적이 있는데, 되게 화려한 집에 가까이 가서 보면 잔뜩 실금이 가 있는 모습, 그게 꼭 40대의 모습인 것 같아요. 당장 집이 무너질 일은 없는데 불안한 거죠. 몇 발자국만 떨어져 보면 그 집은 너무 화려하고 근사해 보이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은... 그런 시기가 아닌가 싶어요.
Q 작가님이 이야기하고 싶었던 40대의 삶이란 어떤 모습이셨나요?
실제로 마흔이 되니까 너무 바쁘더라고요. 심지어 난 결혼도 안 했는데 혼자 살면서도 너무 바쁜 거예요. 만약에 결혼을 했다면 정말 아무것도 되돌아볼 여력이 없었을 것 같아요. 여자들도 마찬가지죠.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요. 자기를 점점 잃어가는 만큼 뻔뻔해지는 그런 40대의 양면성을 다뤄보고 싶었어요.
Q 전에 동생분을 (<Axt> 백다흠 편집장) 인터뷰했을 때,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책을 자연스럽게 많이 접할 수 있었다고 하셨어요. 형제가 지금 책에 관련한 일을 하고 있는 것도 아버지 덕분이겠네요.
네, 책을 굉장히 좋아하셨어요. 집의 모든 벽이 책으로 가득했고 맨 벽이 보이질 않았을 정도였으니까요. 다락방에도 기둥처럼 쌓여 있었고요.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책을 갖고 놀기 시작한 거죠. 저희 아버지도 문창과 출신이라 아버지와 저, 동생까지 저희 집에 문창과 출신만 세 명이에요. 엄마가 얼마나 힘이 드셨겠어요. (웃음) 저는 인문학이 ‘답 없는 것들에 대한 애정’ 혹은 ‘답 없음의 과정을 탐색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완전 답 없는 세 사람이 한 집에 있으니. 엄마는 굉장히 현실적인 분이거든요. 기억에 남는 게, 아버지가 책을 항상 몰래 사다 놓으니까 집에 책이 쌓여서 더 이상 둘 곳이 없는 거예요. 그런 것 때문에 자주 싸우셨던 기억이 나요. 세계문학전집부터 백과사전도 사시고 이것저것. 그러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책이 많이 늘어나 있고, 싸우고 버리고 다시 사고 그런 생활의 반복이었어요. 형제가 둘 다 작가가 아니고 동생은 편집자가 된 게 너무 다행스러운 일이죠. (웃음)
Q 그때 영향을 받은 작가들 있으세요?
기억나는 게 삼성출판사에서 나온 <제3세대 한국문학>이라는 건데 24권짜리에요. 1970~1980년대 작가들이 쓴 건데, 그 책들이 굉장히 좋아요. 대표 작가들이 쓴 책인데 스물네 명의 한국작가들이 다 있어요. 오정희, 이청준, 황석영 등등... 아버지가 문학을 좋아하셨기 때문에 저희도 자연스럽게 문학과 가까워졌어요. 이것도 보고 저것도 보면서 집에 있는 책을 모두 꺼내봤고 그러면서 오정희나 황석영, 도스토옙스키나 프란츠 카프카 작품들도 자연스럽게 읽게 된 거예요. 전 오히려 대학교 때보다 중·고등학교 때 읽은 책이 더 많아요. 그때는 문학을 하려면 그런 책을 읽어야 하는 줄도 몰랐을 때에요. 아침에 책 한 권을 들고 가서 하루 종일 그거 읽고 그랬어요. 그러면서 ‘한국 작가들, 되게 재밌는 작가들이 많구나’ 알게 됐고요. 특히 최인호 선생님의 소설을 정말 좋아했어요.
Q 미처 문학의 길을 택하기도 전에 책 읽기에 흥미를 느끼신 거네요, 아주 자연스럽게.
그렇죠. 그리고 어릴 땐 책장의 맨 위 칸에 손이 안 닿아서 볼 수 없는 책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늘 어떤 책이 있는지 궁금했는데, 중학교 1학년 때인가? 키가 확 커서 꺼내 보니 <채털리 부인의 사랑> <롤리타> 같은 책이 있는 거예요. 엄청 야한데 너무 재미있었어요. 책 자체가. (웃음) ‘아버지가 이렇게 재미있고 야한 책을 혼자만 읽고 계셨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아마 그때부터 책 읽기에 대한 흥미가 생긴 것 같아요. 다흠이와는 다섯 살 차이가 나는데, 제가 집을 떠난 뒤에 중·고등학교 다니면서 저랑 똑같은 과정을 겪었더라고요.
Q 대학교에서 소설 창작 강의를 하고 계신데, 그 나이 또래의 아이들을 보며 많은 부분 영향을 받을 것 같거든요. 삶을 대하는 태도나 문학을 처음 시작했을 때의 마음 등등... 처음엔 학생들에게 굉장히 신경질적이었다고 미안한 마음을 밝히셨는데요.
하하. 전에 신경질적인 선생님이었던 건 맞아요. 애들이 너무 맘에 안 드는 거예요.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나이인데. 그땐 나도 어렸으니까 미덕이 없었어요. 그런데 30대 중반이 넘어가니까 애들이 너무 예쁘고, 귀엽고, 안쓰럽고 그런 마음이 확 커졌어요.
Q 문학의 근간은 ‘시’라고 하셨어요. 소설 창작 강의를 하면서도 학생들에게도 시를 읽으라는 말을 자주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시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것 같아요. 시는 아직까지 언어로 할 수 있는 예술의 범주 안에 있는 유일한 장르 같아요. 소설은 이제 그 범주를 많이 벗어나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요. 물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작가도 있죠. 작가는 마치 벽돌공처럼 하루에 몇 시간씩 꾸준히 작업하지 않으면 ‘서사’라는 장르를 다루기가 쉽지 않거든요. 집중해야만 나오는 거니까요. 이 벽돌공이 되려면 예술적이고 창의적인 마인드가 있어야만 하는데, 그 관건은 ‘시’에 있는 것 같아요. 소설을 일 년 내내 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예술적이고 창의적인 마인드를 잊어버리기 쉽거든요. 그런 마음을 항상 처음처럼 돌려주는 게 ‘시’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늘 가지고 다니면서 들춰보기도 하고 그래요. 그래야만 집을 지을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어요. ‘근간’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Q 좋아하는 시인 있으세요?
너무 많죠. 어릴 때부터 항상 읽었던 시인들은 이성복, 최승자 이런 시인들을 좋아하고, 김수영 시인은 말할 것도 없고요. 근래에는 젊은 시인들도 좋아해요. 한 달이면 시집을 다 긁어모아도 다섯 권이 채 안 돼요. 한 주에 한 권씩 들고 다니면서 보는 거 좋은 것 같아요. 요즘에는 임승유 시인의<아이를 낳았지 나 갖고는 부족할까 봐>라는 시집 읽고 있어요. 알고 보니 아주 예전에 제가 한 학기 가르친 적이 있더라고요. 저보다 나이가 적은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한 살 많았어요. (웃음)
Q 책의 뒷부분에는 작가의 말보다도 앞에 우찬제 문학평론가의 해설이 실려 있습니다. 해설을 넣은 의도가 있었나요?
해설은 제 책에 붙어 있긴 하지만, 저의 글은 아니죠. 최초의 독자가 편집자라면, 그다음 독자는 이 비평가에요. 어떻게 보면 비평가는 ‘전문 독자’인데, 전문 독자가 일반 독자를 위해 들려주는 안내서 같은 느낌이에요. 어쨌거나 전 되게 좋아하고,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작품에 대한 해석은 각자 하기 나름이니까요. 다양한 해석을 위해 이런 해설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특히나 단편집은 더더욱.
Q 사십사를 통해 마흔이라는 나이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보게 됐어요. 이 책을 보는 독자들의 연령대가 다양할 텐데 그분들이 이 책을 어떻게 받아들이길 바라시나요?
메시지보다는 그냥 재밌으면 좋겠어요. 저는 제 소설이 재미없다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다만, 재미라는 게 각자가 생각하기에 있어서 굉장히 여러 의미인 거죠. 어우, 짜증 나. 이런 것도 소설에서는 재미일 수 있고 화가 나는 것도 문학 안에서는 재미일 수 있고. 전 아까도 말했듯이 보편적인 것에 취약해요. (웃음) 문학 안에서 이 이야기가 어떤 의미로든 재미가 있었으면 좋겠고, 메시지는 그다음이에요.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내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지나쳐온 공감일 수도 있으니 재밌게 읽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사진 : 기준서(스튜디오춘)
장소 협조 : 합정 빌리프커피로스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