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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파크 북DB May 19. 2016

금수저들과 맞짱 뜬 패션 디자이너 고태용의 정면승부



"사진은 안 찍죠?" 인터뷰가 있기 전날 밤, 그에게서 온 문자 메시지에 흠칫 놀랐다. 간혹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사진 촬영을 거부하는 인터뷰이들도 있었기에 불길한 생각부터 들었다. 하지만 곧바로 도착한 문자 메시지에 픽하고 웃음이 나왔다. "아침엔 얼굴이 부어 있어서요." 아침에 얼굴 붓는 것부터 고민하는 이 남자. 깐깐하고 예민한 사람은 아닐까, 하고 내심 걱정이 들기도 했지만 적어도 지루한 사람은 아니겠다 싶었다. 꽤 재미있는 인터뷰가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몹시 궁금해졌다.

고태용 디자이너는 살짝 풀어헤친 검정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의외로 깔끔하고 단정한 매무새였다. 화려한 색이 들어갔거나 귀여운 자수가 박힌 옷을 입고 있을 줄 알았는데 뭐랄까, 약간의 배신감이 들었다고 해야 할까. 날렵하고 매끈한 얼굴에서는 살짝 '노는 오빠'의 느낌도 풍겼다. 그의 얼굴을 조금씩 훔쳐보며 실물이 낫다는 칭찬을 던졌더니 배시시 웃으며, 패션계의 아이돌이라는 찬사를 종종 듣는단다. 역시나 재미있는 인터뷰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신의 운동 이야기를 꺼내며 스스럼없이 빗장을 열어 젖혔다.

"주로 앉아서 작업을 하고 밤새우는 일이 많다 보니 건강이 나빠지더라고요. 게다가 사람들 만나는 걸 좋아해서 매일 술에 절어서 지냈죠. 건강을 챙겨야 되겠다는 생각에 운동을 다시금 시작했어요. 한 3년 정도 됐는데 처음에 뺐던 10kg를 아직까지 유지하고 있어요. 침대 밑에 체중계를 놓고 아침마다 확인을 하는데 꾸준하게 운동을 하다 보니 몸도 디자인이 되더라고요. 원래 뭐 하나에 꽂히면 밀어붙이는 성격이라서요. 엊그제는 처음으로 100kg짜리 덤벨을 들어 올렸는데 앞으로 100kg 정도 되는 여자친구를 만나도 거뜬히 들어올릴 수 있을 것 같아요.(웃음)"

그의 운동 이야기를 들으면서 느낀 점이 있다면 고태용은 밝고 유쾌한 사람이라는 것, 꽂히면 앞뒤 안 보고 달려가는 사람이라는 것, 이 두 가지였다. 사실 패션 디자이너로서 그의 삶을 들여다보면 이 두 가지 맥락과 아주 가깝게 닿아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선 그가 이끌고 있는 브랜드 '비욘드 클로젯(Beyond Closet)'의 옷들만 봐도 그렇다. 밝고 유쾌한 소년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옷들은 다양한 색상으로 특유의 달콤한 느낌을 전해준다. 웃음기가 뚝뚝 묻어나는 그의 성격과 비슷한 구석이 많다.

사실 그는 학창시절 미술을 배워본 적도 없고, 유학파 출신은 더욱이 아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그저 점수에 맞춰 지방 대학의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했는데 부모님의 권유로 가톨릭대 의상학과로 편입을 했다. 그 뒤로 2008년, 스물일곱 최연소의 나이로 서울패션위크에 데뷔해 비욘드 클로젯을 이끄는 수장이 되어 세계 무대에 진출하는 동시에 '개티'를 유행시켜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다. 지금은 많은 팬들을 거느리고 있는 스타 디자이너이지만 데뷔 당시만 해도 한동안은 수입이 없어 패션쇼에서 모델에게 입혔던 옷을 되팔아 새 옷을 만들었다. 패션쇼를 할 때에는 한 푼이라도 아끼고자 친구들을 동원해 야산에 가서 낙엽을 끌어 모아 쇼장을 장식하기도 했다. 인천에서 서울 신사동까지 8년 동안 출퇴근을 반복했는데, 5평짜리 사무실을 구했을 때에도 무너지면 안 된다는 오기와 배짱 하나로 버텨냈던 그였다.



돈과 명예, 멋과 취향에 대한 패션 디자이너 고태용의 고백

고태용 디자이너는 최근 데뷔 10년을 앞두고 그간의 발자취를 담아 책 <세상은 나를 꺾을 수 없다>를 펴냈다. 사실 그는 책을 내보자는 제안을 꽤 오래전부터 받아왔다. 누구보다 추진력이 강한 그였지만 책을 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은 평소 수없이 받아왔던 질문에 대해 좀 더 성의 있는 대답을 하고 싶어서였다. 그래서일까. 고태용 디자이너의 책은 얼핏 봤을 때에는 자서전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일반적인 자서전과는 분위기가 조금 다르다. 패션 디자이너를 꿈꾸는 이들에게 허세나 겉멋으로 치장된 말이나 막연히 힘을 내라는 응원을 건네는 대신 '직설'에 가까운 조언을 던진다. 굉장히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조언들이다. 그의 성격만큼이나 솔직하다.

"데뷔할 당시에 부잣집 아들이거나 유명 디자인 학교를 졸업한 사람으로 오해를 많이 받았어요. 남들 얘기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편이라 그냥 제 자리에서 맡은 일을 꾸준히 했죠. 한편으로는 그런 시선들을 은근히 즐기기도 했고요.(웃음) 저는 '된다', '안 된다'를 놓고 오래 고민하는 대신 제가 한 선택을 어떻게든 되게끔 하는 걸 즐겨요. 처음 서울패션위크에 나간다고 했을 때만해도 주변에서는 다들 미쳤다고 비웃었어요. 아무나 하는 거 아니라면서요. 뉴욕에 진출할 때에도, 백화점에 매장을 연다고 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죠. 그런데 저는 그 '아무나'라는 말이 싫었어요. 저는 아무나가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이런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어요. 힙합 뮤지션 도끼의 노래 중에 '내가'라는 노래를 좋아해요. '내가 망할 것 같냐'라는 가사가 재미있는 노래죠. 지코의 노래 'Tough Cookie(터프 쿠키)' 중에서 '내 경쟁상대는 방송국에 없다'라는 가사도 좋아해요. 누군가 보면 미쳤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제가 최고라 생각하면서 스스로와 싸워왔어요."

고태용 디자이너는 최연소라는 화려한 타이틀로 주목을 받으며 국내 패션계에서 '앙팡 테리블'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출세가 빠르면 인생이 불행해질 수 있다는 말도 있지 않나. 남들보다 빠른 성공과 유명세가 혹시 독이 되거나 자만함의 빌미가 되지는 않았는지 궁금했다. 이에 대한 그의 대답은 기대 이상으로 솔직하고 거침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어깨에 뽕이 장난 아니게 많았죠.(웃음) 정말 2년 전까지만 해도 그랬어요. 그때는 정말 뭘 해도 다 되던 때였거든요. 대기업들과의 협업도 1년에 20개를 진행했고, 인터뷰만 한 달에 5~6개씩 했으니까요. 가로수길에 매장을 열었는데 손님들이 200미터씩 줄을 서고, 패션쇼를 하면 300명씩 못 들어오고 그랬거든요. 옷도 너무 잘 팔리니까 주변에서는 우스갯소리로 돌멩이를 갖다 놔도 팔리겠다고 했었어요. 사실 그때의 저는 굉장히 이기적이었던 사람이었죠. 오직 저 하나만 생각했고, 세상이 저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느꼈으니까요."

당시의 그는 돈을 많이 벌어서 하루 빨리 유명해지고 싶었다.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고, 성공에 대한 갈망으로 매일매일 목이 말랐다. 경주마처럼 앞만 보며 직진했고 결국에는 돈과 유명세를 모두 거머쥘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갈수록 허전해졌다. 돈과 유명세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 때였다. 다행히도 그는 주변 사람들을 통해 자신을 제련해나갈 줄 아는 명민한 디자이너였다.

"제 주변에는 겸손함에 대해 보고 배울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요. 특히 저보다 어린 친구들에게 자극을 많이 받는 것 같아요. 지코와 함께 방송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정말 바쁘던 때였거든요. 잠을 네 시간밖에 못 자고 새벽에 촬영을 나갔는데 순간 짜증이 확 밀려오더라고요. 그런데 한 시간도 못 자고 왔다는 지코가 불평을 하기는커녕 그 상황을 너무 감사하게 생각하는 거예요. 자신을 찾아주는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하다면서요. 그때 참 많이 배웠죠."



좀 '다른' 패션 디자이너 고태용의 내 멋대로 사는 법

그에게 있어 옷을 잘 입다는 것의 기준은 무엇인지 궁금했다. 대답은 간단했다.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옷을 입는다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최근에 유행하는 브랜드의 옷을 입으면 잘 입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옷을 입는 게 우선이라고 했다.

"원래 분홍색은 여성들의 전유물이잖아요. 그런데 배우 이동휘씨로 인해서 요즘 많은 남성들이 분홍색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어요. 남자가 분홍색 옷을 입었는데 별로라고 한다면 거부감이 들기 마련인데, 이동휘씨는 자연스럽게 소화를 하더라고요. 저는 이렇게 자신에게 잘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고태용 디자이너는 '소통'에 능하다. 데뷔 당시부터 각종 SNS를 통해 자신을 알려왔고, 오늘날까지도 인스타그램과 트위터를 통해 수만 명의 팬과 소통을 하고 있다. 디자이너로서 대중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1년에 단 두 번뿐이라는 사실에 만족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비욘드 클로젯은 컬렉션 라인을 비롯해 세컨드 라인, 홈쇼핑 라인으로도 출시가 됐고 대기업들과의 협업도 끊임없이 이어왔다. 심지어 그는 대중을 상대로 한 옷만큼은 시시각각으로 반응을 지켜본다. 신상품에 올라온 댓글을 모두 수집해 다음 옷에 적용시킬 정도다. 하지만 컬렉션 라인에 대한 생각만큼은 다르다.

"컬렉션 라인은 사실 거의 팔리지 않아요. 요즘에 와서 조금씩 팔리는 정도랄까요. 그럼에도 컬렉션 라인에 대해서는 그 무엇과도 타협하고 싶지 않아요. 컬렉션 의상으로 20만 원짜리 티셔츠를 내놓았을 때 100명 중에 '와 이거 죽이는데'라는 한두 명만 있어도 그걸로 만족해요. 만약 패션이라는 단어를 아는 사람 열 명이 있고, 그 중에 컬렉션에 대해 아는 사람 다섯 명, 패션에 대해 전문적으로 아는 사람이 한두 명이라고 한다면 저는 그 전부를 다 끌어들이고 싶어요. 보통의 디자이너들은 이 중에서 어느 군에 속한다고 자신을 정하는데 저는 달라요. 욕심이 많아서 항상 두 마리 토끼를 쫓는 사람이죠."

혹시 지금의 인기가 언젠가는 썰물처럼 밀려갈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불안감은 없을까.

"앞으로 예전 같은 인기가 계속되지 않는다고 해도 괜찮아요. 제가 아무리 인기가 많고 돈을 벌어봤자 패션 디자이너라는 직업군 안에서 그런 것이라는 걸, 작은 존재일 수 있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그럼에도 비욘드 클로젯을 세계 무대에서 키워보고 싶은 꿈을 갖고 있어요. 지금까지는 클래식한 아이템을 재해석하는 데 집중했지만 오뜨 꾸띄르 같은 하이패션에도 도전해보고 싶고요. 6개월에 딱 한 벌의 옷만 만들어보는 식으로요. 멋있는 카페를 만들어보고 싶기도 하고. 아휴, 그런데 이걸 다 하고 나면 얼마나 또 잘난 척을 하겠어요.(웃음)"

고태용 디자이너는 웬만한 돌다리쯤은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며 첨벙첨벙 뛰어드는 사람이었다. 돌다리를 건너다 넘어지고 물에 풍덩 빠진다 해도 주저앉아 울거나 뒤로 물러서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다. 겁주고 위협하는 세상에 놀라며 뒷걸음질 치고 달아나는 대신, 단단히 팔짱을 끼고 노려보는 세상에 혓바닥을 내밀고 냅다 뛰어나가는 그런 사람이었다. 주저앉아 잠든 적이 없는, 매일 새로운 내일을 꿈꾸는 유쾌한 몽상가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사진 : 남경호(스튜디오2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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