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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파크 북DB Aug 24. 2016

사람의 얼굴을 두려워하지 않는 개혁자, 존 낙스

종교개혁 500년 우리는 지금

           

필자가 1995년 세인트앤드류 대학으로 유학을 간 이유는 바로 낙스(John Knox)에 대해 연구하고 싶어서였다. 루터나 칼빈과 달리 낙스는 신학자보다는 목회자로, 설교자로 교회 개혁의 실제적인 모습을 보여준 개혁자였다. 낙스의 서신을 읽어 보면, 격동의 시기에 교회 개혁을 꿈꾸던 낙스의 체온이 전해지는 느낌이 든다. 낙스에 비하면 루터와 칼빈은 비교적 평온한 상황에서 개혁 활동한 셈이다. 개혁 초기부터 임종 시까지 낙스의 일생은 시련과 격동의 연속이었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이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예상하시고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던 요한복음 17장의 한 구절로, 낙스는 1572년 11월 24일 죽음을 앞두고 아내의 음성을 통해 이 구절을 묵상하면서 남아 있는 스코틀랜드 형제들을 위해 기도했다.

낙스는 누구인가

스코틀랜드 개혁가 존 낙스는 1514년 하딩톤 시골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세인트앤드류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사제로 임명되었다. 당시 스코틀랜드에서는 개신교 신앙이 법적으로 보장되지 않았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이미 독일의 루터에 의해 종교개혁이 시작된 상태였다. 유럽의 종교개혁가들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부패와 미신적인 교리, 성직자들의 세속화와 성적인 타락 등에 반발하였다. 그러나 카톨릭 교회의 잘못된 모습을 바로 세우자는 것이었지 카톨릭주의자들이 얘기하는 것처럼 결코 반란이나 혁명이 아니었다. 

사제로 임명된 낙스는 어거스틴의 저술을 접하면서 카톨릭 교리의 모순을 깨닫기 시작한다. 그러나 낙스를 개신교 신앙의 지도자로 변화시킨 결정적인 사건은 존경하던 개신교 지도자 조지 위샤트의 순교였다. 낙스는 위샤트를 대신하여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교훈을 보여 주는 초대교회의 모습을 스코틀랜드에 세우고자 했다. 그러나 당시 스코틀랜드는 카톨릭 이외에는 어떤 교회도 허용치 않는 종교적 탄압이 극심한 나라로 그의 개혁 의지가 현실로 나타나기에는 어려움이 컸다. 더욱이 그가 추종하며 따르던 지도자 위샤트가 순교하고, 스코틀랜드 의회가 이미 개신교를 이단으로 정죄하는 법안을 통과시킨 어려운 시기였다.

당시 개신교 신앙을 탄압하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인 추기경 비튼이 1546년 5월에 살해되자, 이 비튼의 살해 혐의가 개신교들에게 향하면서 박해가 이전보다 더 심해졌고, 개신교도들은 자신들의 신앙의 자유를 찾아 세인트앤드류 성으로 피신했다. 이때 낙스는 이들에게 설교를 요청받고 그 성의 목회자로 부임한다. 세인트앤드류 성에서의 목회로 그의 공적 사역이 시작되었다. 카톨릭주의자들은 그의 사역을 묵인하지 않았다. 스코틀랜드 정부는 성 안의 개신교도들을 탄압하고자 당시 스코틀랜드와 긴밀한 외교 관계를 맺고 있던 프랑스와 협력하여 개신교도들을 포위하였다. 

카톨릭 교회가 승리했고 개신교도는 패배했다. 낙스를 비롯한 개신교도들은 19개월 동안 프랑스의 노예선에 감금되어 고된 홍역을 치루었다. 노예가 된 낙스와 개신교도들은 미사를 강요당하며 카톨릭 신앙으로의 개종을 강요받았다. 낙스는 포로에서 석방된 이후에 더욱 하나님의 복음의 나팔을 크게 불어야겠다는 결심으로 가득 찼다. 프랑스 노예선에서의 시간은 그에게 찾아온 두 번째 큰 시련이었지만, 이로 인해 그의 소명 의식은 더 확고해졌다. 노예선에서 카톨릭 교회의 우상숭배와 교리적 탈선, 카톨릭 교리의 지나친 선행 강조가 복음의 진리를 오히려 파괴시킨다는 사실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낙스의 강한 집념은 많은 난관에 부딪혔다. 1550년 스코틀랜드와 유럽의 정세가 개신교인들에게 불리해지자 이에 개신교 지도자들은 망명 생활을 시작했다. 프랑스의 칼빈과 베자 불링거 등은 유럽의 망명지(제네바)에서 개혁을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망명지는 신앙의 자유를 원하던 유럽 개신교도들의 집합 장소였다. 이들에게는 신앙의 지도자가 필요했고, 유럽의 개신교 지도자들은 조국을 떠난 피난민들을 위해 설교자이자 지도자로 낙스를 초빙했다.

낙스는 조국 스코틀랜드의 여건이 좋아질 때까지 이들 개신교 지도자들과 교제하면서 자신의 개혁 신앙의 원리를 체계화시켜 나갔다. 낙스가 노예선에 감금되었을 때, 그의 석방을 위해 애쓴 영국의 서머셋 공작의 영향으로 낙스의 첫 망명지는 영국이 되었다. 영국에서 목회하는 동안 낙스는 주교들과 심한 논쟁을 벌였는데, 그의 일관된 주장은 예배와 교리에 인간의 마음이나 생각을 적용하는 것은 신을 모독하는 것이며 우상숭배라는 지적이었다.

그러나 영국의 왕 튜더 메리가 신교도들을 이단으로 몰며 종교 탄압을 감행하자, 낙스는 1554년부터 프랑스의 디에페, 스위스의 제네바,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등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낙스가 개신교도들에게 설교한 내용의 핵심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만을 최고로 인정하는 것과 인간이 의에 이르는 수단은 오직 믿음에 의한다는 것이었다. 낙스는 피난민들에게 자신의 설교하면서 카톨릭 교회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섰다.

당시 이러한 비판은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위험한 것이었지만 낙스의 각오는 대단했다. 장모에게 보내는 글에 "제가 빈곤이나 망명 생활로 고난받는 것이 크다 해도 하나님의 자비로운 섭리가 저를 복음의 증인으로, 주님의 군병으로 만드십니다"라고 하였듯이, 낙스는 자신이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은 주의 사자임을 느끼고 있었다.

하나님의 나팔수, 낙스

1559년, 낙스는 망명 생활을 마치고 조국인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다. 당시 스코틀랜드는 영국과 프랑스의 이권 다툼의 장이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자신들의 입지를 유리하게 하려고 스코틀랜드를 정략적으로 이용하고 있었으며, 스코틀랜드의 귀족들과 의회도 이들의 하수인이 되어 있었으므로 불안한 시기였다. 낙스가 귀국한 후 세인트앤드류를 개혁하려 하자 대주교는 병력을 동원하여 낙스에게 "당신이 만일 앞으로 교회에서 카톨릭 교회를 비판하는 설교를 하면 당신은 죽을 것"이라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낙스는 단호히 주교의 위협을 무시하면서 "내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산다면 주님께서 내 생명의 피난처가 되시므로 나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는다"라고 대답했다.

이후 낙스는 세인트 가일즈 교회에서 목회했는데, 그의 설교는 수백 개의 나팔을 부는 소리만큼이나 설교를 듣는 이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 낙스는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자기의 조국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결심했다. 이런 이유에서 낙스에게 붙여진 별칭이 '하나님의 나팔수'였다.  

다행스럽게도 망명 이후 스코틀랜드의 상황이 영국의 도움으로 급변하여 이전보다는 목회하기에 어렵지 않았다. 개혁 신앙을 위한 순교의 피가 밀알이 된 것이다. 개혁 신앙의 여파로 의회 내 귀족들의 개신교로의 회심과 일반 대중들의 개신교로의 전향은 그의 목회에 큰 힘이 되었다.

이러한 현상을 대변해 주는 대표적인 사건이 1560년 스코틀랜드 의회에서 개신교 신앙을 법적으로 인준한 것과 낙스가 기초한 '스코틀랜드의 신앙고백서'가 채택된 사건이었다. 스코틀랜드 개혁의 열매인 '스코틀랜드의 신앙고백서'는 1560년 낙스를 포함한 6명의 목회자로 구성된 위원회에서 작성했는데, 이 고백서는 어떠한 교회가 진정한 교회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진정한 교회는 첫째 말씀을 바로 설교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둘째 성례를 바로 집행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셋째 교리를 바로 가르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스의 조국 개혁은 쉽지 않았다. 낙스에게 닥친 세 번째 시련은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의 귀국이었다. 메리는 프랑스 왕이었던 남편 프란시스가 죽자 프랑스로부터 귀국한 것이었다. 메리의 귀국이 낙스에게 위협이 된 것은 분명하였다. 메리는 개신교도들을 탄압한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였다. 낙스와 스코틀랜드 개신교도들에게 메리의 귀국은 비극이었다. 메리가 귀국하던 날 낙스는 "하늘도 메리의 귀국을 슬퍼하였으며 그녀가 귀국한 후 이틀 동안 햇빛을 볼 수 없었다"라고 회고한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실추된 권위를 회복하려는 메리 정부의 시도는 낙스와 마찰을 일으켰으며, 자연히 종교적 분쟁을 심화시켰다. 낙스는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을 불신하는 <여성 통치자에 대한 첫 번째 나팔>이라는 저서를 통해 그녀의 통치를 비판했다. 메리가 낙스에게 "백성들이 왕에게 저항하며 반기를 들 수 있느냐"라고 질문하자, 낙스는 "만일 아버지가 정신이 이상해 자식을 살해하려고 하면, 자식들은 힘을 모아 무기를 들고서라도 아버지에게 저항할 수 있지 않느냐"라고 반문하면서, "군주도 자신이 행해야 할 범위를 넘어서면, 백성들로부터 저항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이는 메리의 종교적 탄압에 대한 저항의 정당성을 피력한 그의 대표적 견해라고 할 수 있다.

1567년, 메리 여왕이 죽은 후 제임스 6세가 왕으로 즉위하면서 스코틀랜드는 한동안 평화로웠다. 1560년에 의회에서 인준한 개신교도들을 위한 신앙 자유의 입법 조치가 회복되었기 때문이다. 스코틀랜드는 낙스에게 큰 빚을 진 것이다. 낙스는 신앙의 자유를 쟁취하고, 즉 종교개혁을 이룩했으나 육체적 질병이 그를 덮쳤다.

낙스의 죽음은 스코틀랜드뿐 아니라 개신교 신앙을 수호하는 모든 이들의 아픔이자 슬픔이었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낙스는 1572년 11월 24일 에딘버러의 집에서 그의 일생을 마쳤다. 에딘버러 사람들이 낙스의 임종 전에 말씀을 듣고자 교회 옆 사택(낙스 하우스)에 모여들었다. 바람이 추운 겨울날 낙스는 모여든 사람들에게 침대에 누워서 마지막까지 말씀을 전했다. 마지막 숨을 거두기전까지 나지막한 소리로 말씀을 전하다가 낙스는 임종을 맞이한다. 낙스는 마지막까지 설교를 하다가 하나님의 품에 안긴 하나님 말씀의 나팔수였다.      

장례식에 모여 든 군중들 앞에서 새 섭정자 모튼은 다음과 같이 애도했다.

"여기 이 세상의 사람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은 사람,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한 낙스가 누워 있다."

낙스가 오늘에 말하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종교개혁자 낙스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몇 가지 있다고 본다. 먼저 낙스는 자신의 개혁을 말하면서 늘 하나님의 섭리를 강조한다. 낙스는 자신의 주장이나 신념을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근거하여 전적으로 섭리에 의지하였다. 그의 삶은 시종일관 하나님의 섭리에 근거하였다. 이 시대에 기독교 사관이 무엇이냐 묻는 질문에 우리는 크리스천으로 습관적으로 섭리를 말하는 사관이 아니라, 낙스처럼 실제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고백하고 인정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두 번째로 낙스는 위기의 상황에서 자신의 조국, 스코틀랜드의 개혁을 위해 예언자적 소명으로 자신을 바라본다. 이 분명한 소명이 낙스를 용기있는 개혁자로 만든 것이다. 그의 선지자적인 역사의식과 소명감은 낙스의 중요한 개혁 원리였다. 낙스의 사상이 급진적이라는 일부의 비판이 있지만, 낙스의 교회 개혁을 향한 용기와 강한 소명감이 부럽다.   

세 번째로 우리는 낙스의 개혁에서 신앙고백의 중요성을 보게 된다. 개혁을 성취한 낙스는 먼저 동료들과 함께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를 작성한 후, 이를 예배와 신앙의 규범으로 채택하였다. 오늘날 교회의 위기는 신학과 신앙의 위기로 나타나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분명한 신앙고백이 없다는 것이다.

교회에는 분명한 신앙의 기준과 성경적인 신학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우리 주변에 많은 장로교회와 감리교회, 침례교회가 있지만, 장로교의 신앙고백과 감리교와 침례교의 신앙 고백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교회 내에 많은 설교가 있지만 교리 공부는 여전히 등한시되고 있는 현실이다. 교회 내에 영적 부흥과 성장의 대한 프로그램이 많지만, 교리 공부를 좀 더 체계적으로 가르칠 필요가 있다. 주일 예배 전에 요리문답을 공부하는 것도 중요한 시도가 될 것이며, 교인들에게 신앙고백에 필요한 교리 모범을 교육해야 한다고 본다. 

글쓴이 : 권태경
기독교학문연구회 역사분과장이자 총신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로 존 낙스를 전공하여 종교개혁사를 가르치고 있다.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사 연구소와 미국의 칼빈 대학에서 종교개혁사 연구 교수를 역임하였고, 지금은 사당동에 문화사역으로 카페사역(와우카페)을 하고 있다.


※ 본 칼럼은 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세계관월간지 <월드뷰> 2016년 4월호에 실린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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