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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파크 북DB Aug 23. 2016

여성은 무인도에서 혼자 살 수 있을까

산골독서가의 세상읽기

                       

여기 지리산 피아골에서 한동안 지내다 서울(동거인의 집)에 가면 당황스럽다. 옷, 특히 바지가 작아서 입을 수가 없다. 산에서 지내는 며칠 사이 살이 찐 거다. 지리산에 오면 입맛이 좋아지거나, 멧돼지라도 잡아 먹어서 그런 게 아니다. 서울의 동거인은 종종 전화를 걸어 말한다.


"이웃들이 주는 음식 좀 적당히 받아 먹어! 당신도 사례 좀 하고."


그렇다. 이웃들이 나를 살 찌운다. 나쁜 마음으로 이웃을 이용한다면,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삼시 세 끼를 때울 수 있을 것 같다. 최근엔 아랫집, 옆집에서 동시에 같이 고기 먹자고 불러 선택해서 밥을 먹은 적도 있다.  

다른 마을에 살 때도 그랬다. 옆집 엄니가 떡과 수육을 들고 왔는데, 잠시 뒤 아랫집 엄니는 아예 쟁반에 밥상을 차려 왔다. 그때 나는 이미 떡과 수육으로 배 부른 상태였다.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엄니는 평상에 앉아 밥상을 비울 때까지 나를 지켜봤다. 


"어여 자셔. 혼자 밥해 묵고 살라믄, 얼매나 힘들 것이여. 꼭꼭 씹어 드셔."


약 30분 간격으로 두 번의 식사를 하니, 지리산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그렇게 며칠 살면, 포동포동 살이 오른다. 


내 자랑을 하거나, 이곳이 모두가 함께 잘 먹고 잘 사는 유토피아라는 걸 말하는 게 아니다. 이 땅에 그런 곳은 없다. 아래는 내 처지와 많이 다른, 반대의 상황이다. 


엄니들의 관심으로 포동포동 살찌는 나… 하지만 내가 여자라면?


선배는 어느 지역 A마을로 혼자 귀촌했다. 마을 한복판의 집이었다. '돌싱'이었고, 여자였다. 선배의 과거는 모두의 관심사였고, 일부의 사람은 셜록 홈즈처럼 진실을 캐고 다녔다. 집에 못 박을 일이 있어 이웃 남자에게 도움을 청하면, 누군가는 "저 여자가, 동네 남자를 집에 불러들인다"며 수군댔다.


밥상을 차려다 주는 이웃? 그런 건 기대하기 어려웠다. 마늘이 떨어져 이웃집을 찾았더니, 한동안 "여자가 얼마나 살림을 못하면 집에 마늘이 떨어진 것도 모르겠느냐", "여자가 살림을 안 해서 서방이 떠났다" 등의 이야기가 돌았다. 선배는 1년 만에 그 마을을 떠났다.

선배의 처신이나 여러 관계를 자세히 알 수 없기에, 선배의 경험을 일반화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선배와 나의 상황 차이는, 서로의 인간성이 낳은 결과가 아닌 건 확실하다. 달라도 너무 다른 선배와 나의 처지, 이것은 여성과 남성의 문제다. 


남성인 나는 주로 이웃들에게 "혼자서 밥은 잘 해 먹고 다니느냐"는 동정의 말을 듣는다. 마을 엄니들은 "김치는 있느냐"며 각종 김치를 자주 들고 온다. 내가 라면을 끓여 먹으면 "우리 집 와서 밥 먹지 웬 라면?" 하며 안타까워 한다.


만약 내가 여자라면? 이웃들은 "혼자서도 밥 잘 해먹지?"라고 물을 가능성이 크다. 집에 김치가 떨어지면 "여자가 김치도 못 담가?"라는 질문을 받을 테고, 라면을 먹고 있으면 "밥하는 게 귀찮아서 그러고 있느냐"는 괜한 타박을 받을 거다.


연세가 많은 어르신들일수록 가부장제의 영향을 크게 받은 건 당연하다. 내게 밥상을 들고 온 엄니의 모습에선 선함 마음이 크게 보이지만, 평생 남성에게 희생하고 봉사(?)했던 '엄니의 과거'도 많이 읽힌다.


마을에서 행사가 있으면 여러 어르신과 이웃들은 마을회관이나 경로당에서 음식을 만들어 함께 나눠 먹는다. 도시에선 보기 어려운 좋은 모습이다. 하지만 음식을 만들고, 밥상을 차리고, 치우고, 설거지하고, 정리하는 일 거의 대부분은 '여성'인 엄니들의 몫인 건 여기나 도시나 똑같다.


인심 좋고 순박한 시골인심이라는 말로 '퉁칠' 일이 아니다. "시골 엄니들의 강력한 생명력"이라는 표현은, 남녀 차별의 잔인한 역사를 뭉개버리는 거친 말일 수도 있다. 


마을 행사에서 밥상을 차리는 사람은 '여성'인 엄니들이다

지리산 산골의 더위도 '남녀'의 느낌은 다르다


다니엘 디포가 쓴 <로빈슨 크루소>를 읽을 때, 엉뚱하게도(혹은 당연하게) '로빈슨 크루소'가 여자였다면 이게 가능했을까'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폭풍을 만난 배가 침몰해 로빈슨 크루소가 무인도에서 홀로 오랜 세월을 살아가는 이야기가 골자인 <로빈슨 크루소>. 유명해도 너무 유명한 이 고전의 주인공 로빈슨 크루소는 당연히 남성이다.


그는 난파된 배에서 각종 연장을 꺼내오고, 땅굴을 파서 생활을 하는가 하면, 도끼질을 해서 집과 담을 만들고, 심지어 카약 같은 배도 만들어낸다. 혼자 농사를 짓고, 염소 사냥을 하는 건 앞의 일에 비하면 무척 쉬워 보인다. 그런데, 그가 여자였다면 이런 게 가능했을까?


<로빈슨 크루소>가 18세기 초 세상에 나온 이후, 역경을 이겨낸 인간, 고독을 즐기고 극복한 사람, 도전과 불굴의 의지를 상징하는 인물은 단연 '남성' 로빈슨 크루소였다.


<로빈슨 크루소>의 주인공은 여성이 될 수 없다. 18세기, 아니 그 이전의 시대에 여성은 배를 타고 항해를 하거나 미지의 세계로 떠날 수 없었다. 집에서 밥을 하고, 애를 키워야 했으니까. 제국주의적인 침략과 식민지 무역의 주인공들은 당연히 남자였다. 그러니 난파된 배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아 무인도에 홀로 남게 될 기회(?) 역시 남성만이 잡을 수 있었다.


18세기에 나온 책은 긍정적인 생각과 적응, '그럼에도 살아보자'는 삶의 자세를 21세기의 인간에게도 심어준다. 그러다 어느 순간, '어쨌든 도전해보자'는 이 생각도 내가 남성이어서 쉽게 품는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아, 어렵다. 어쩌면 '여성이라면 무인도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생존할 수 없을 거야'라는 생각이야말로 남성의 건방진 생각일 수도 있다.


슬슬 지리산에 찬바람이 분다. 지난 여름 여성 귀촌자들은 남성보다 더 덥게 살았다. 남성들은 웃통 까고 문 열어 놓은 채 편히 자곤 했지만, 여러 여자들은 문을 꼭 잠근 채 끈적이는 몸 뒤척이며 잤다. 산골의 더위도 남녀의 느낌은 다르다.


어렵지만, 서로의 처지에서 생각해보는 건 이 산골에서도 필요한 자세다.


글 : 칼럼니스트 박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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